1000만의 마음을 적신 단종과 엄흥도
숙부인 세조에 의해 희생당한 조카이자 어린 왕, 단종.
우린 역사책을 통해 익히 단종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순간들이 어떠했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장항준 감독의 신작 <왕과 사는 남자> 는 세조가 된 수양대군의 정권 탈취 사건인 계유정난 이후 스러진 비운의 왕, 단종의 시간을 생생하게 비춘다.
이는 짧은 기록 너머의 이야기이자 인간 이홍위와 엄흥도의 뜨거운 교감 그리고 함께 했을지 모를 사람들의 이야기다.
단종은 세종대왕의 장손이자 문종의 장자로서 적통 계승자였다. 하지만 숙부인 수양대군의 정권 찬탈로 인해 왕이 된 지 불과 3년 된 해에 강제로 왕위를 양위하고 유배길에 오른다.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1457년 7월, 임금이었던 어린 이홍위는 그렇게 강원도 영월의 두메산골 청령포로 유배길에 올랐다. 영화는 폭염과 빗길을 뚫고 산 넘고 물 건너 타지로 내쫓긴, 모든 걸 잃은 어린 왕의 공허함과 비통함, 우울함과 무기력함이 가득한 눈빛을 클로즈업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죽음만을 기다리는 눈빛의 소년을.
한 마리 원통한 새 왕궁을 나와
외로운 몸 외짝 그림자 푸른 산중을 헤맨다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은 이룰 수 없고
해마다 한을 다하고자 하나 한은 끝이 없네
자규 소리도 끊긴 새벽 묏부리 달빛만 희고
피 뿌린 듯 봄 골짜기 떨어진 꽃이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라 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어찌해서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듣는가
- 단종이 유배를 떠나 자규루에서 지었던 시 -
불과 17세에 모든 권리와 의지, 희망을 처참히 짓밟힌 채 가본 적 없는 먼 타지로 내쫓겨야 했던 어린 소년의 심정은 가히 짐작도 할 수 없다. 당시 할아버지인 세종과 아버지 문종 등 그를 아꼈던 왕실 웃어른들의 부재에 충신들마저 희생당해 그의 의지처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룻배로만 출입이 가능한, 굽이치는 강물에 둘러싸인 유배지, 청령포에 당도한 이홍위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영화는 단종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유배지에서 보낸 4개월 동안 어떤 일상을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채웠다.
청령포에는 순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촌장 엄흥도가 있었다.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의 보호 아래 유배생활을 시작한 이홍위는 주민들과 많은 교감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점차 인간 대 인간으로 우정을 나누게 된다. 이윽고 새로운 의지를 갖게 된다. 안색과 눈에 빛이 깃든다.
영화는 '비운의 왕'이라는 수식어 뒤, 어린 왕의 고뇌와 내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 변화, 마지막 선택까지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아래 내용은 스포가 될 수 있습니다)
단종의 유배생활은 4개월 만에 끝이 났다.
운명은 그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어서 졸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조 시대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후에 <중종실록>에 의하면 “고을 아전이었던 엄흥도라는 사람이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이 자리에 장사를 치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정조 때 간행된 <국조인물고>에서도 엄흥도가 단종의 장례를 치렀던 당시 상황을 전한다. "화가 내릴 것이라고 하면서 만류하는 데도 엄흥도가 말하기를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달게 여기겠다.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는 기록이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면 삼족을 멸한다는 포고령에도 목숨을 걸고 동강에 버려진 그 시신을 거뒀던 엄흥도. 직접 시신을 묻고 단종이 입고 있던 어의를 들고 충청도 계룡산 동학사를 찾아가 생육신 김시습과 함께 제사를 올린 후 홀연히 그 종적을 감췄다고 전해진다.
그의 의로운 성정은 후대에 이르러 재평가를 받았다.
순조 때 공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고종 13년, 엄흥도의 공을 높이 기리며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내린 것이다.
오롯이 단종이 된 배우 박지훈과 오롯이 엄흥도인 배우 유해진의 마지막 애달픈 씬에 관객은 그 시대, 그 순간으로 타임슬립하게 된다. 우리도 그날 그때에 서 있던 것처럼. 이로 인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단종앓이 중이다.
엄흥도에게 이홍위란 어떤 존재였을까. 이홍위에게 엄흥도란 어떤 존재였을까.
궐을 떠나 지냈던 시간이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이미 역사가 우리에게 단종의 슬픈 엔딩을 스포한 바 있지만 엄흥도가 단종에게 전한 충정과 온기로 조금이나마 그의 마지막 순간이 외롭지 않았기를.
단전에서부터 올라온 슬픔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가시지 않았다. 몇 분간 울면서 영화관을 걸어 나온 후에도 슬픔이 응어리처럼 어딘가에 깊이 박혀 있었다.
이윽고 내내 기원했다.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잘 알지 못했던 어린 왕이 부디 환생해 전생에서 못다 한 것들을 누리기를. 엄흥도와 어딘가에서 깊은 우정을 오래도록 나누기를. 좋은 사람들만 만나 충만한 행복으로 가득 채우기를.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달게 여기겠다.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엄흥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