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비장한 각오로 부모님께 선전포고 했다. 그때의 나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나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집에서 통학했다.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임에도 나는 운이 좋게도 본가와 학교가 가까웠다. 이런저런 이유로 집에서 통학했고, 학업과 취업 준비에 전념한단 이유로 용돈벌이 알바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무사히 여름 인턴 생활을 마치고 정 직원으로 전환된다고 하니, 나름 효도하고 은혜를 갚고 싶은 마음이 앞서긴 했나 보다.
그런 의무감에서인지, 나는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처가를 포함한 양가 부모님께 자식 된 도리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 그런 마음으로 시간을 자주 보내기도 하고, 병원을 가야 할 일이 있으면 굳이 함께 가기도 했다.
"아빠가 쓰러졌대."
지난여름이었다. 아내가 분주하게 아이들 밥을 챙겨주며, 이제 막 퇴근한 나에게 말했다. 장인어른께서 응급실에 가셨다고 한다. 그렇게 아내는 먼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가 장모님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심근경색이었다. 퇴근길에 인적이 드문 길에서 쓰러지셨다고 한다. 중환자실에 일주일 정도 있었을까. 담당의사가 보호자인 나와 아내, 그리고 장모님과 함께 면담을 하기로 했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우리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만 쏟아내었다. 골든타임을 놓쳐 응급수술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던지, 회복하기 어렵다던지, 혹은 이런 상태를 식물인간 상태라고 한다던지. 그의 말은 우리에게 비수처럼 꽂혔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난 지금도 장인어른은 병상에서 깨어나질 못하고 있다. 어쩌면 조심스러웠던 그의 말이 현실이 되었다.
병상에 있는 장인어른과 홀로 집에 지내시는 장모님, 그리고 부정맥으로 매일 심장약을 복용해야 하는 할머니, 그리고 몇 년 전 암 수술을 받은 아버지까지.
늘 내가 챙겨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해외 주재를 준비하다 보니, 이들을 누가 챙겨야 할까 걱정이 앞선다. 할머니는 고모에게, 아버지는 누나에게, 처가댁의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처형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미안하고 고마웠다. 이것이 가장의 무게인가 싶었다.
물론 필자는 주재원은 아닌 프로젝트성 파견이지만, 보통 주재원들의 가장 큰 고민은 본인의 업무보다도 가족들이다. 현지로 함께 갈 가족들에 대한 걱정, 그리고 한국에 남아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 이로 인해 도전을 멈추는 이들도 있고, 선택을 유예하는 이들도 많다.
그럼에도 내가 해외발령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오히려 해외 업무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다.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가는 발령이기에. 가장의 무게를 느낀 나는 비로소 누구보다 힘차게 달려야 할 이유가 생겼다. 후회하지 않을 만한 2년을 보내고 오리라! 이 글을 통해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