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은 종이를 받아 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 모두 고생했다. 부족한 부분을 돌아보고 남은 기간 잘 준비하도록."
담임은 정훈을 지나쳐 교실을 한 바퀴 돌며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6월 모의고 결과가 나온 것이다. 11월 수능은 아직 먼 일이었지만, 반환점을 돈 아이들은 저마다 만감이 교차했다. 교실에는 탄성과 한숨이 서로 스쳐 지나갔고, 지나간 자리에는 투박한 에어컨 소리만 남았다. 1998년 여름이었다.
1997년 겨울, IMF가 터졌다. 뉴스에서는 매일 실업률과 환율 이야기가 쏟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큰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 갔다. 정훈의 아버지 길준도 그랬다. 작은 철물 도매상을 하던 그는 거래처의 부도와 함께 빚더미에 앉았다. 집은 전셋값을 빼 작은 반지하로 옮겼고, 어머니 은숙은 식당 보조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같은 반 아이들 중에도 아버지가 실직한 집이 여럿 있었다. 교실 뒤에 붙어 있던 '대학 진학 목표' 게시판에는 몇몇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그들은 진학 대신 취업을 선택한 아이들이었다. 정훈도 그 선택지를 잠깐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은숙이 말했다. "너는 공부해. 공부가 이 반지하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야."
정훈은 물끄러미 자신이 받아 든 종이를 매만졌다. 담임이 툭 던져 놓은 그 성적표였다. 그것은 마치 반환점을 지나 결승선으로 되돌아가는 티켓 같았다. 3월에 치렀던 첫 시험의 긴장, 그리고 실수.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책상을 빼곡히 채운 메모지에는 '1등급', '성공', '실수'라는 단어가 가득했다. 그 위로 수없이 읽어 너덜너덜해진 문제집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노력의 흔적을 바라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지난 4월이었다. 첫 성적표를 받아 든 날. 정훈은 부끄러운 성적표를 들고 터벅터벅 학원으로 향했다. 금원구에서 대치동까지 지하철로 한 시간. 퇴근길 사람들 사이에 끼여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성적표를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저... 선생님, 여기..."
지석은 이미 정훈의 표정만으로 알 수 있었다. 고3 첫 성적이 형편없었다는 것을. 지석은 차분하게 물었다.
"정훈아, 네가 가고 싶은 학교는 어디야?"
한참을 생각하던 정훈이 입을 열었다.
"...서울대요."
"지금 성적으로는 네가 원하는 학교에 갈 수 없어. 다른 학교를 목표로 하든지, 아니면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든지."
벽을 가득 채운 명문대 합격 현수막, 그 중심에 있는 지석. 일타강사 지석은 정훈의 친구들 사이에서 신이자 영웅이었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잘 가르친다고 명성이 자자했고, 정훈도 올해 2월부터 지석에게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물론, 단숨에 성과가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일찍이 학원 수업을 듣고 싶었던 정훈은 고3이 되어서야 어머니를 설득할 수 있었다. 단지 비싸다는 이유였다. 아니, 비싸다는 것이 아니라,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정확했을 것이다. IMF 이후 길준의 빚을 갚느라 은숙은 매달 생활비를 쪼개고 또 쪼갰다.
정훈의 가족은 강남 8학군과는 거리가 먼 금원구에 살고 있었다. 반지하 방 두 개짜리 집에서 대치동 유명 학원에 보내기에는 교통비까지 합치면 만만치 않은 비용이었다. 은숙은 정훈이 고1 때부터 집 근처 학원이라도 보내려고 설득했지만, 어린 정훈의 마음은 확고했다.
"나, 꼭 성공하고 싶어 엄마. 공부 잘하고, 성공해서 엄마 아빠 편하게 해드리고 싶어."
은숙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열여덟 살 아들이 해야 할 말 치곤 묵직한 무게감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너무 많은 짐을 준 것은 아닌지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은숙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으니까.
결국 정훈과 은숙은 고3부터 지석의 학원을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거리도 만만치 않았다. 정훈은 그때부터 먼 거리의 지하철도 거리낌 없이 이용했다. 스스로 부족한 부분은 늘 알아서 채워왔던 정훈이었다. 지하철 안에서 영어 단어를 외우고, 눈을 감고 이어폰을 꽂은 채 듣기를 하곤 했다. 은숙의 부담을 알기에 무엇이든 허투루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노력이 바로 그의 인생의 훈장이었기에.
고3 여름이 되자, 정훈은 지석의 애제자가 되었다. 6월 시험 결과가 이를 증명했다.
지석도 부족한 형편의 정훈에게 더 마음이 갔다. 개천에서 용 나듯, 정훈을 성공시키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 갔다. 그것보다 더 정확히는 학원의 큰 현수막에 들어갈 한 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IMF의 시대, 어려운 환경에서도 성공한 학생의 스토리. 어쩌면 정훈의 이야기를 입시 설명회에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석은 정훈을 그럴 재목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밤12시, 학원에 남아 혼자 공부하고 있는 정훈에게 지석이 말했다.
"정훈아,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선생님, 6월 결과처럼 수능에서도 실력 발휘해볼게요."
지석은 정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음 지었다. 그 때, 어린 정훈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지석과 은숙에게 자신이 이루어 낸 모든 결과의 공을 돌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리고 그 모든 노력이 자신에게도 자랑스러운 훈장이 되기를 바랐다. 학원을 나서며 대치동의 밤거리를 걸었다. 학원가에는 여전히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옆 건물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 마중 나온 부모들의 차, 간식을 파는 노점상. 그렇지만 정훈에게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다. 금원구까지는 지하철로 한 시간이었다. 정훈은 이어폰을 꽂고 단어장을 펼쳤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정훈에게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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