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던 정훈은 숨이 가팠다.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 하나씩 제쳐도 끊임없이 나오는 친구들. 산 정상에 가장 먼저 오르고 싶은 정훈. 그는 이를 악물었다. 비명을 삼키듯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이윽고 소리쳤다.
"안 돼... 멈춰! 내가 먼저 올라갈 거야!"
정훈은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정훈아, 무슨 일이니?"
은숙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반지하의 낡고 얇은 방문을 뚫고, 정훈의 소리가 그대로 건너편 은숙의 방까지 들렸다.
"꿈을 꿨어요. 등산하는 꿈이었어요. 제가 먼저 올라가려 했는데..."
은숙은 잠시 정훈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평소 낮잠도 안 자던 애가 낮잠도 자고, 이상하다 싶었네. 입시 때문에 고민이 많은가 보구나. 오늘은 엄마랑 잠시 이야기 좀 하자."
은숙은 주방에서 시원한 매실차 한 잔을 가져와 작은 손수건과 함께 정훈에게 건넸다. 매실차는 은숙이 여름에 직접 담근 것이었다. 설탕을 아끼느라 좀 시큼했지만, 정훈은 그 맛을 좋아했다.
"이거 한 잔 마시고, 땀 좀 닦아."
"네, 고마워요 엄마."
정훈이 찻잔을 들자, 은숙이 물었다.
"정훈이는 뭐가 되고 싶어?"
"음... 전 그냥 좋은 학교 가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인정받는 기업에서 일하고 싶어요."
"그런 거 말고, 그냥 뭐 그런 거 있잖아.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따로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엄마는 그런 게 있었어요?"
은숙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정훈이 엄마지."
"아뇨, 그런 거 말고요. 방금 엄마가 말했던..."
은숙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엄마도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어.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고 나니 뭘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기 어렵더구나. 그냥 직업을 가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난 너의 엄마가 되었지."
은숙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반지하 창으로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만 보였다.
"시간을 돌이켜보니 그게 가장 아쉬워. 그리고 정훈이를 키우다 보니 어느덧 정훈이도 나와 비슷하게 자란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정훈은 은숙이 건넨 매실차를 음미하듯 들이켰다.
"지금은 그냥 좋은 학교에 가고 싶어요. 가서 고민해도 늦지 않잖아요."
"그래, 그렇게 해. 어느 학교에 갈지는 고민해봤어?"
이번 수능에서 정훈은 서울대에 예비 합격했다. 예비 3번이었지만, 며칠 뒤 서울대 대학본부에서 전화가 한 통 왔다. 앞서 합격한 학생들의 등록 포기로 정훈도 입학이 가능하다는 연락이었다. 심장이 뛰었다. 서울대. 지석에게 말했던 그 학교. 은숙에게 약속했던 '좋은 학교'.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훈은 집에서 가까운 한국대도 합격했다. 한국대는 서울대보다 입시 성적이 낮지만, 입학만 하면 학교를 다니는 내내 장학금이 보장된 곳이었다. 입학 석차 3등. 4년 전액 장학금.
문득, 정훈은 길준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며칠 전 저녁, 길준이 처음으로 정훈에게 진학 이야기를 꺼냈다. 밥상 위에 놓인 소주잔을 비우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정훈아, 아버지가 이래서 미안하다. 장학금 받을 수 있는 학교로 가면... 좀 더 학업에 집중할 수 있지 않겠니."
그 말은 부탁이 아니라 고백이었다. 정훈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정훈은 멍하니 새콤달콤한 매실차를 담은 찻잔에 손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대답을 바로 못 하는 것 보니, 아직 고민이 끝나지 않았나 보네."
은숙이 말했다. 정훈은 다 마신 찻잔을 테이블에 탁 내려놓더니 말했다.
"제 인생을 결정할 문제잖아요. 신중해야죠."
"그래, 우리 정훈이 대견해. 하지만 고민을 하는 데 있어서 엄마 아빠와 충분히 논의를 했으면 좋겠어. 아직 이 집 남은 대출도 많고... 더군다나 한국대는 장학생이잖니. 한국대도 누구나 알아주는 명문이기도 하고..."
은숙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현실은 날카로웠다. 정훈도 알고 있었다. 서울대에 가면 등록금을 내야 한다. 장학금이 없으면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한다. 이미 빚이 있는 집에 빚을 더 얹는 격이었다.
"알아요! 그만하시고, 이제 제 방에서 나가주세요 엄마."
정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표정이 일그러졌다.
쾅! 방문이 닫혔다. 은숙이 쫓겨나듯 나왔다. 정훈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꺼낸 자신이 원망스럽고 후회만 가득했다. 식탁 위에는 은행의 대출 납부 안내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IMF 이후 밀린 이자가 불어난 금액. 은숙은 그 안내서를 뒤집어 놓았다. 정훈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면서.
은숙은 길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정훈이... 아직인가 봐요... 우리가 조금만 더 기다려봐요."
수화기 너머의 길준 목소리를 듣던 은숙은 이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긴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문틈 사이로 정훈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 밤, 정훈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반지하 방의 좁은 천장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들었다. 세상은 정훈의 고민과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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