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차가운 걸 보니, 수능은 맞나 보다. 어제 예비 소집 때는 뜨거운 태양으로 늦가을 날씨를 보이더니, 수능 한파는 여지없었다. 1998년 11월 18일. 정훈의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서둘러 나가자."
정훈의 아버지 길준이 말했다.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길준이 정훈을 차로 데려다주는 것은.
그는 무뚝뚝한 아버지였다. 몇 번의 사업 실패로 돌보지 못한 가정은 그에게 늘 미안함과 아쉬움이 가득한 곳이었다. 작년 IMF 때 철물 도매상이 무너진 뒤, 길준은 더 말이 없어졌다. 아침에 나가서 밤에 들어왔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가족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정훈이 중2 때 잠시 가출했을 때도, 고1 때 참고서를 산다고 알바를 했을 때도 그는 아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길준이 오늘은 정훈을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차라고 해봐야 10년 된 낡은 쏘나타였지만, 길준은 전날 밤 세차까지 해두었다니. 은숙이 그 모습을 보며 놀란 눈으로 정훈에게 귀띔해주었다.
"아버지가 세차했어. 태어나서 처음 봤다."
길준은 시동을 걸며 살가운 한마디를 건넸다.
"후회 없이 하고 와라. 그동안 고생 많았다."
태어나서 18년 동안 한마디 없던 아버지의 말은 묵직하지만 가여웠다. 그동안 아무 말 못 했던 길준처럼, 정훈도 이내 말문이 막혔다.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를 이해한다고 한다. 어쩌면 정훈은 너무 빨리 그를 이해하게 된 것일 수도 있겠다. IMF가 아버지를 무너뜨렸고, 무너진 아버지를 보며 정훈은 일찍 어른이 되었다. 길준의 차 창문에 하얗게 김이 서렸다. 창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침 7시. 오롯이 길준과 정훈, 둘만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부자 간의 정적은 수능 시험장까지 이어졌다.
끽—.
"너무 긴장하지 말고."
"네, 아버지. 고마워요."
정훈이 차에서 내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길준은 운전석에 앉은 채 정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에 서린 김 때문에 아버지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훈은 알았다. 그의 아버지도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쿵. 쿵. 쿵. 쿵. 파이팅!
「지금까지 고생한 선배님들을 응원합니다! — 금원고등학교 2학년 일동 —」
차에서 내리자, 둘만의 어색한 정적을 깨는 북소리가 들렸다. 후배들의 응원이었다. 정훈도 작년에 이 자리에 있었다. 시간이 흘러 후배들의 응원을 듣는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시험장에 들어서며 정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같은 학교 아이들, 처음 보는 아이들. 모두 같은 표정이었다. 긴장, 불안, 그리고 그것을 누르려는 의지. 정훈은 자리에 앉아 연필을 꺼냈다. 어젯밤 깎아 둔 연필 끝이 날카로웠다.
딩동댕동. 딩딩댕댕.
"이야, 끝이다!"
시험장을 제일 먼저 박차고 나온 친구들은 소리를 질렀다. 끝없던 부담감이 드디어 끝났다는 개운함을 담은 포효였다. 새까만 추위는 노오란 태양과 함께 사라졌다. 사라진 그 곳에는 은숙이 있었다. 은숙은 시험이 끝난 정훈과 마주했다.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손에는 따뜻한 호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어땠어?"
"..."
"배고프지? 이거 먹으면서 가자."
은숙은 정훈에게 시험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때로 침묵은 대답이 되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정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능이 끝난 서울 거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바쁘게 걸었고, 차는 밀리고 있었다. 정훈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하루가 끝났지만,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돌아가고 있었다.
정훈은 집에 오자마자 가채점을 했다. 결과는 6월 성적보다 좋지 않았다. 수학에서 실수가 있었고, 언어 영역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때의 성적이 최선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실력 발휘를 못 한 걸까?'
정훈은 그때 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이 것이 그에게 새로운 갈증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갈증이 20년 넘게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특례, 그거 될까요?』다음화 바로 보기 : 03화 3등이어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