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외출 준비를 마친 정훈이 은숙에게 다가가 한마디를 건넸다.
"한국대. 등록하고 올게요."
깜짝 놀란 은숙이 다시 되물었다.
"어딜?"
정훈은 짧게 숨을 고르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국대요. 제 성적이 입학 2등이래요.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 받을 수 있잖아요. 엄마 아빠께 부담 드리고 싶지 않아요. 당분간 제 걱정 마세요, 엄마."
은숙은 울먹이며 정훈을 부둥켜안았다. 그리고는 어린아이처럼 흐느꼈다.
"아이구, 우리 아들... 미안하다..."
물먹은 솜처럼 축 처진 정훈은 힘이 없었다. 결국 그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서울대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의 기쁨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어쩌면 그가 원한 선택은 아니었다. 어쩔수 없다는 합리화가 그의 마음속에 들어앉았다.
그는 자신의 어릴적 가정 환경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것이 대물림되지 않기를 다짐했다. 내 아이에게는 이런 선택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내 아이에게는 원하는 학교에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겠다고. 그 다짐이 정훈의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이때의 정훈은 알지 못했다. 그는 한국대에 2등으로 입학하게 된다.
「신입생 여러분의 입학을 환영합니다. — 한국대학교 —」
신입생들이 입학하는 봄의 캠퍼스에는 낭만이 있다. 때때로 쌀쌀한 날씨가 몸을 움츠러들게 하고, 또 어느 날에는 뜨거운 태양빛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1999년 3월. IMF의 한파가 여전히 사회를 얼어붙게 하고 있었지만, 캠퍼스의 봄바람은 정훈의 차가운 마음도 누그러뜨렸다. 한국대에 입학하는 것이 썩 마음에 드는 선택은 아니었지만, 전국의 학벌로 보았을 때 상위권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4년 전액 장학금이라는 것이 그와 현실적인 타협안이었다.
입학식 날, 정훈은 강당에 앉아 총장의 축사를 들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로운 얼굴들. 새로운 시작.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가방에서 필기도구를 꺼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자율전공학부 맞죠?"
"네, 맞아요."
"반가워요! 저는 박현주라고 해요."
현주는 단발머리에 깔끔한 인상이었다. 말투는 차분했지만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정훈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저는 조정훈이라고 해요."
어색한 시작이었지만, 정훈은 씩씩하고 붙임성있는 현주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것도 재밌었다. 정훈은 차츰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새 친구를 사귀고, 동아리에 들고, 열정 가득했던 수험생 시절처럼 공부도 했다. 여느 대학생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생활이었다. 한편으로 대학 생활을 하는 내내 그는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다시는 고3 때처럼 후회하는 선택을 하진 않을 거야. 내 의지로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할 거야.'
입학과 동시에 같은 학과 친구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현주는, 그런 정훈의 확고한 태도가 내심 마음에 들었다. 말 뿐인 꿈이 아닌, 분명한 목표를 가진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현주도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부유하지 않은 가정, 성실한 부모, 그리고 공부로 삶을 바꾸겠다는 의지.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4학년이 되자, 취업 시즌이 시작되었다. 2002년. IMF의 후유증은 가셨지만, 취업 시장은 여전히 녹록치 않았다.
"정훈아, 넌 졸업하면 어느 회사에 가고 싶어?"
현주가 물었다. 학교 도서관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어느 사이에 친구 이상의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뿐. 현주의 질문에 정훈은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야 물론 태성전자지. 난 취업 준비하는 내내 결심을 바꾼 적이 없어."
"그런데 태성전자는... 작년 과탑이었던 유정 선배도 취업이 어려웠던 곳이잖아."
정훈이 어깨를 으쓱대며 팔짱을 끼고 웃었다.
"그래서 더 도전하고 싶은 거지.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어?"
"태성전자는 지원할 때 어학 실력도 높아야 하더라고. 너도 어학 성적이 있는 거야?"
"이번에 시험 본 게 오늘 성적 발표야. 바로 지원할 수 있을 거야."
정훈은 스마트폰을 꺼내 방금 발표된 어학 성적을 열람했다. 화면을 보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
"어라? 분명히 난 시험을 잘 봤는데, 성적이 왜... 이러지?"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최소 지원 자격을 맞추지 못했다. 영어 성적을 중요시하는 태성전자는 일찍이 어학 능력을 갖춘 글로벌 인재를 채용하기로 유명했다. 결과는 '레벨B'였다. 정훈이 본 시험은 외국어 능력 시험이었다. 가장 최상위 등급은 레벨S, 그리고 레벨A, 레벨B, 레벨C 순서. 태성전자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최소 레벨A가 필요했다.
정훈은 적잖이 충격에 빠졌다. 고등학교 때 암기 하나로는 학교에서 손에 꼽는 실력자였고, 그동안 봤던 어학 시험도 좋은 성적으로 늘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어학 시험은 달랐다. 결과가 그것을 증명했다. 충격에 빠져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정훈에게 현주가 물었다.
"그럼 세광전자는 어때? 네가 학부 과정 때 했던 연구 분야랑 비슷하기도 하고..."
"아니, 그런데... 나의 목표는..."
▶『특례, 그거 될까요?』다음화 바로 보기 : 자격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