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고생했던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면 주저할 틈이 없었다. 정훈은 올해 꼭 취업하고 싶었다. 반지하 방의 대출 안내서, 은숙의 식당 보조 일, 길준의 빈 소주병. 그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럼 세광전자에 지원해볼게. 알려줘서 고마워, 현주야."
또 한 번의 '합리적 후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서울대 대신 한국대, 그리고 태성전자가 아닌 세광전자. 정훈의 인생은 항상 1등이 아닌 2등. 최선이 아닌 차선. 하지만 그는 항상 그 차선 위에서 최선을 다해왔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곤 했다. 현주는 정훈을 도와주며 마음 한쪽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를 돕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아직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정훈과 현주가 어느샌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며칠 뒤, 정훈에게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세광전자에 입사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정훈은 문자를 보며 주먹을 쥐었다. 기쁨이 아니라 다짐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세광전자의 2등이 아니라, 세광전자의 1등이 되겠다고.
그리고 그 해 겨울, 정훈은 현주에게 고백했다. 현주는 웃으며 대답했다.
"너랑 함께 하는 앞날이 기대돼."
2022년 가을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약속 시간에 제때 도착한 정훈과 지민은 빈 의자를 바라보며 운을 뗐다.
"수찬이 또 늦는대?"
"이번엔 지하철이 밀린단다."
"이 녀석 맨날 이러네. 맘에 안 든다니까 진짜."
"야, 네가 좀 참아라."
정훈과 지민, 수찬은 둘도 없는 한국대 삼총사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가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술 한잔 기울이던 그들이었다. 졸업한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렇게 일 년에 서너 번은 만났다.
정훈과 지민은 잠시 그때를 추억하며 시간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땐 낭만이 있었다. 그치 않냐?"
"낭만? 얼어 죽을. 맥주 한잔하고 수업 들어가는 게 낭만이냐?"
"야, 그래도 나 그 과목은 에이쁠이다. 넌 비... 뭐라고?"
"야, 그 얘기 그만하라니까!"
추억 여행을 마칠 즈음, 그들 옆에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수찬이 능글맞은 말투로 말을 건넸다.
"아이고, 늦었습니다. 형님들. 죄송합니다."
"빨리 안 와? 오늘 2차까지 형님이라고 해야 된다 너."
"형님, 1차만 하시죠. 제 자존심이 거기까진 못 갑니다만."
지민은 수찬에게 술잔을 내어주더니 맥주를 한가득 따르며 물었다.
"왜 이렇게 바쁘냐? 평소에는 칼퇴한다며. 오늘은 퇴근도 늦고 말야."
"안 그래도 바빠 죽겠다. 내년부터는 AI에도 투자한다고 하고."
수찬은 지민과 정훈을 향해 푸념 섞인 자랑을 늘어놓았다.
"태성이 그나마 돈 많이 주니까 버티지. 이번 연말 보너스로 차나 바꿔야겠다."
"오~ 차를 바꾼다고? 뭘로?"
"이번에 나온 제네시스 멋있던데? 우리도 이제 회사 15년 차 아니냐. 좋은 차도 타고 해야지. 수영이도 그걸 원하고."
"수영이랑 빨리 결혼이나 해 임마. 결혼할 생각은 있냐?"
수찬과 지민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정훈은 왠지 모를 박탈감을 느꼈다. 태성전자. 정훈이 원래 가고 싶었던 곳. 레벨B 때문에 지원조차 못 했던 곳. 수찬은 한국대에서 정훈보다 성적이 낮았지만, 어학 점수 하나로 태성전자에 들어갔다.
'내가 갔어야 하는 자리야. 내가 태성을 갔어야 한다고.'
지민이 눈치를 챈 듯 화제를 슬며시 돌렸다.
"정훈아, 너는 뭐 좋은 소식 없냐?"
"좋은 소식? 음... 우리 민재랑 민서가 학교에서 우수상 받은 거?"
순간 수찬은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이래서 난 유부남이랑 잘 공감이 안 된다니까. 그게 너한테 좋은 거냐? 너한테 좋은 소식 없냐고! 현주랑 애들 소식 말고."
정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한테 좋은 소식? 올해 상위 평가도 놓쳤고, 부장 진급도 아직 요원하고. 뭐가 있지?'
"야! 그게 나한테는 좋은 소식이야. 우리 애들이 잘 해야 나도 기쁘고, 회사 일도 잘되고. 오죽했으면 가화만사성이라고 하지 않겠냐? 넌 아직 몰라 임마."
지민이 술잔을 들며 중재했다.
"자~ 짠! 우리 우정을 위해 한잔하자!"
짠!
정훈은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먼저 자리를 떴다. 현주가 일찍 오라고 했다는 핑계를 대고.
띠띠띠띠. 띠리링.
현관문을 연 정훈은 술기운을 덜어내기 위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신발을 벗었다. 어두운 현관을 지나 안방을 향해 걸어갔다.
"왜 벌써 와?"
새하얗게 내려오는 불빛 아래에 있던 현주가 물었다.
"수찬이가 집에 일찍 간다고 해서. 그 녀석 진짜 하는 짓마다 재수없다니까."
"왜? 수찬이가 또 회사 자랑해?"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정훈은 비밀이라도 들킨 것 마냥 움찔하더니, 현주에게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자긴 왜 지금까지 안 자고 있어?"
"그냥... 요새 애들 성적이 영... 학교랑 학원에 집중을 잘 하고 있는 건지..."
"이번 중간고사가 별로야?"
"지난번보다 엄청 떨어졌어. 특히 민재는 뭔 말도 없으니,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있나."
"다른 고민이 있는 거 아니야? 애들도 벌써 초6이니까."
"글쎄, 모르겠네. 아무튼 내가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애들 학원 데려다줄 때마다 다른 엄마들 표정 보면 나만 이런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
정훈은 현주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현주야."
"응?"
"우리 그냥 서울 말고 어디 한적한 데 가서 살까? 내가 지금 어디 가도 자리 잡을 능력도 되고..."
"뭐? 또 이상한 소리하네. 당신이 여기 오자고 한 거거든요."
"아니... 서울에서 이렇게 아등바등 사느니..."
"조용히... 발 닦고 얼른 주무세요. 서방님~ 알았죠?"
현주는 정훈의 손을 잡고 일어서서 방으로 향했다.
"우리 멋진 서방님, 나는 나의 역할이 있고, 당신은 당신의 역할이 있어. 괜히 내 이야기 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내일도 열심히 일하세요. 잘 자요."
정훈은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뜬눈으로 뒤척이며, 수찬의 제네시스가, 태성전자의 보너스가, 그리고 민재의 떨어진 성적표가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특례, 그거 될까요?』다음화 바로 보기 : 엄마들의 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