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붓 한 한자루 그려 넣고는
하늘에 붓 한 한자루 그려 넣고는/ 조성범
하늘에
붓 한 자루 그려 넣고는
그 붓을 꺼내들고
힘껏 휘둘러 낮달에 덧칠한다
달빛은 흐릿해지고
높고 파란 하늘 끝에서
불어온 꽁무니바람이 목젖에 걸려
재채기 나오려 하는 한낮
여름이 몸 풀고 떠난 숲에서
나뭇잎 사이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받아
생의 결실을 보는 고추잠자리 날갯짓에
각시 생각 난 것도 아닌데
마중물이 없이도 샘솟는 가을날 사랫길
살살이꽃 이파리에 정인 얼굴 그린 것도 아닌데
이유없이 민망해져 단풍보다 먼저 물들어 버린 가슴
한적한 길 갓에 살짝 내려놓고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