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블랙커피위를 걷는 유목민

by 조성범


편의점 진열대 한켠, 검은 캔 하나가 나를 기다린다.

이른 새벽 버스 정류장. 버스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설 때부터, 나는 그 검은 원통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 블랙캔커피. 사치라기보다는 마지노선에 가까운, 하루의 각성을 위한 의식이자 연료. 이천 원 남짓한 이 캔 하나가, 인천공항 수하물 노동자의 아침을 견디게 해준다.


커피를 들고 정류장 벤치에 앉는다. 새벽은 늘 무표정하다. 잠에서 덜 깨어난 콘크리트 벽면, 먼지 낀 유리창, 자동문 너머로 쏟아지는 형광등의 백색 불빛. 그 아래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무게를 끌고 출근길에 나선다. 나는 아직 그 하루에 온전히 들어서지 못한 채, 미지근해진 커피를 입술에 대고 잠시 기다린다. 피곤은 진즉 몸속에 가라앉아 있지만, 마음은 아직 떠다닌다.


이따금 나는 내 삶이 한편의 시 같다고 느낀다. 박인환의 시, 가령 그런 구절 ― “한 세상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뿐”. 수하물처리장 안의 시간도 그런 식이다. 반복되지만 정지되어 있고, 소리도 냄새도 일정하지만 매일 조금씩 다르다. 컨베이어벨트 위를 흐르는 수십, 수백 개의 가방들. 그 안에 든 사연들. 이름표 하나 없는 짐처럼, 나도 묵묵히 그 옆을 따라 걷는다. 불빛 아래서, 무전기 소리 틈에서, 허리를 굽히고 팔을 뻗는 일. 몸이 기억하는 노동은 때로 생각보다 더 조용하게 마음을 잠식한다.


누군가 말했다. “넌 역마살이 있나 보다.”

어릴 적 나는 그 말을 조금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다. 낯선 곳을 동경했고, 떠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머무는 법을 몰라서 떠도는 삶. 정착보다 퇴근을 기다리는 삶. 공항이라는 장소는 그 상징성만으로도 나를 자꾸 멀리 데려간다. 매일 수백 대의 비행기가 이착륙하고, 수만 명의 사람이 떠나고,도착하는 그곳에서, 나는 단 한 발짝도 떠나지 못한 채 머문다. 떠나는 사람을 보내고, 돌아오는 사람의 짐을 내려놓는 일. 삶은 내게 늘 그런 역할을 맡긴다. 등장하지 않는 조연, 익명의 손.


그럴 때면 나는 블랙커피를 다시 생각한다.

검은 액체 속에 녹아든 무표정한 씁쓸함. 피곤을 덜어주지도, 허기를 달래주지도 않지만, 왠지 그것 하나면 하루를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이 캔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 위를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겉은 단단하고 매끈하지만, 속은 깊고 복잡한 이 세계를. 이따금은 무표정한 일상 위를 유영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의 하루는 떠도는 것 같고, 떠돌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을 것만 같다.


퇴근 무렵, 다시 검암역. 사람들의 얼굴은 오전보다 더 피로해져 있다. 내 것도 그렇겠지.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른다. 아직 뜯지 않은 커피 캔 하나를 가방에서 꺼낸다. 방금 전에 맡았던 아크릴 냄새, 벨트의 마찰음, 땀과 먼지에 뒤섞인 공기가 아직 몸에 배어 있다. 이쯤에서 생각한다. ‘나는 도대체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곧, 질문은 허공으로 사라진다. 삶은 어쩌면 모두 짐을 들고 걷는 일이 아닐까. 우리는 저마다의 무게를 끌며 살아간다. 내 짐은 블랙커피 하나일 수도 있고, 벤치 위의 짧은 숨결일 수도 있다.


언젠가 박인환은 말했다. “모든 낙엽은 바람을 따라간다.”

나도 그 낙엽처럼 하루하루 바람을 따라 걷는다. 공항버스의 진동에 흔들리고, 수하물처리장 조명 아래서 말없이 일하고, 퇴근길 벤치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는다. 내일도 같은 캔커피를 마시겠지. 같은 플랫폼, 같은 공기, 같은 고단함. 하지만 그 안에도 조용한 위로가 있다. 정지된 삶 속에서 나만의 리듬으로 걷는 발걸음, 마시지 않아도 곁에 있어주는 블랙커피 한 캔처럼.


그러니 나는 오늘도, 블랙커피 위를 걷는다. 쓸쓸하되 지지 않고, 고단하되 무너지지 않으며. 떠나는 사람들의 뒤를 지키며, 머무는 법을 배워가며. 그러는 사이, 내 안에도 어렴풋한 시 한 줄이 맺혀간다.

나는 어쩌면, 유목민이다. 들판 대신 활주로 주변를 떠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