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석양은 길 위에 남는다

by 조성범


인천공항 제1터미널에서 수속하고 지하 3층 트레인을 타고 이동해서 도착한 탑승동. 오후 2시를 넘긴 시간,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떠나고 있었고, 우리는 같은 목적지를 향해 모여 있었다. 열두 명. 낯선 이들이 조용한 들뜸을 안고 게이트 앞에 섰다. 중국남방항공 CZ6074 출발 시각은 14시 35분. 정오의 빛이 아직 활주로 위에 눌러앉아 있을 무렵, 우리는 천천히 기내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찾아 앉고, 안전벨트를 맸다. 떨림 없는 이륙. 비행기는 인천을 떠나 구름 위로 조용히 솟아올랐다.

비행 내내 우리는 말이 없었다. 안내방송은 낯선 억양의 중국어였고 기내식은 예상 가능한 맛이었다. 사람들은 피곤해 보였고, 나는 멍하니 구름을 바라보았다. 떠난다는 감각보다 비워진다는 감각이 더 가까웠다.

착륙을 앞두고 좌석등이 꺼졌다. 승무원이 다가와 창문을 닫아달라는 말과 손짓을 했다. 연길공항은 군사공항이었다. 기내는 어둠 속으로 침잠했고 우리는 조용히 착륙을 기다렸다. 기체는 부드럽게 지상에 닿았다.

문이 나서자 한낮의 열기가 들이쳤다. 뜨거운 공기 속에서 현지 여성 가이드와 젊은 보조 가이드가 우리를 맞이했다. 연길의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버스는 부드럽게 달렸고, 창밖으로는 붉은 벽돌 건물과 빽빽한 나무 그림자가 흘렀다.

누군가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졸았고,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찍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익숙하지 않은 공기 속에서는 낯선 침묵이 차라리 편안했다.

용정, 기원시 우물. 낡은 쇠사슬이 감싼 돌기둥. 그 아래로 물 한 점이 고요히 깃들어 있었다. 가이드는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꺼냈지만, 내겐 오히려 우물 곁에 서 있던 나무 한 그루가 더 깊게 남았다. 그 몸통에 눌어붙은 시간들. 말 없는 세월이 거기 매달려 있었다.

햇살은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버스는 남쪽, 이도백하를 향해 달렸다. 석양은 유리창을 타고 흘렀고, 그 빛은 얼굴과 산 그림자를 겹치게 만들었다. 나는 그 겹침 속에서 비로소 ‘도착했다’는 감각을 얻었다.

저녁 식사는 ‘강원도식당’이라는 조선족 식당에서였다. 연길 출신의 중년 여성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말씨는 부드러웠고, 눈빛은 오래된 산골처럼 조용했다.

식당 앞 허름한 좌판 하나. 그 앞에서 중국인 장정이 흙 묻은 산삼 뿌리를 한 뿌리씩 곧게 진열하고 있었다. 투명 상자 위엔 손글씨로 ‘백두산 산삼, 원기회복’이라 적혀 있었고, 그는 지나가는 우리를 향해 “헝요, 백두산 거. 진짜야!”라고 소리쳤지만 우리 중 누구도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이도백하의 석양이 천천히 산등성이에 걸려 있었다. 밥상에는 이곳 현지식이 정갈하게 차려졌다. 목이버섯, 감자채 볶음, 돼지고기 볶음, 손바닥만 한 닭다리조림, 맑은 된장국, 두부조림, 그리고 김치.

간은 세지 않았고, 국물은 순했고, 쌀은 이 땅의 것이 분명했다. 묘하게 낯설었고, 어딘가 익숙했다. 사람들은 말이 많지 않았지만 식사는 빠르게 사라졌다. 누군가는 천천히, 누군가는 허겁지겁. 그저 서로가 조용히 씹고 삼키는 그 풍경이 삶의 본질에 가까웠다.

식사가 끝난 뒤, 천정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창문을 열자 저 멀리 백두산 자락이 어둠 속에서 윤곽만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생각했다.

비행기 안에서 닫았던 창, 말없이 산삼을 진열하던 사내, 목이버섯을 조심스레 먹던 낯선 이들. 그 장면들은 말보다 오래 남을 기억이 될 것 같았다.

백두산은 아직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산에 닿기도 전에 나는 이미 어떤 정점에 다다른 것이 아닐까.

그날, 석양은 길 위에 남았고 나는 그 빛 속에서 내 안의 낯섦과 처음으로 눈을 맞췄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