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문득, 그녀를 다시 발견하는 늦가을

by 조성범

여름의 더운 공기가 실내로 스며들던 날, 제과점 유리창에는 얇은 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팥빙수에서 올라오던 단순한 단내, 숟가락이 그릇에 닿아 튀던 짧은 소리,

얼음이 입안에서 천천히 녹던 촉감까지 선명히 기억난다.

그녀가 얼굴 가까이 다가와 입술 끝을 살며시 닦아주던 순간도 있었다.

말은 거의 없었지만, 그날의 거리감은 자연스레 좁혀져 있었다.

스쳐 지나간 장면이라 여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또렷해졌다.

인천 대공원 늦가을 바람은 한층 낮아진 기운을 품고 나뭇잎 사이를 스쳤다.

메타세쿼이아 길가 흙냄새는 여름보다 진하게 올라왔고,

낙엽은 밟을 때마다 속이 비어 있는 듯한 소리를 냈다.

목덜미로 스며든 바람은 차가웠지만, 익숙한 날들의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나는 걸음을 늦추고, 땅 위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어렴풋이 닿는 시간이 우리 사이를 채웠다.

노을빛 아래 그녀가 서 있었다.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비친 표정에는, 오래 함께한 사람만이 지닌 단단함이 있었고

처음 만났던 날과 멀지 않은 자리에서 다시 마주한 듯한 느낌이었다.

갈대밭에서 불어오는 바람 냄새가 잔잔히 스며들고,

멀리 풀잎끼리 스치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나는 그 소리에 발걸음을 맞추듯 천천히 아내에게 다가갔다.

바람이 이마를 스칠 때, 그녀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함께 지나온 계절이 얹혀 있었다.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자, 익숙한 온기만으로 충분했다.

말보다 먼저 놓이는 온기 속에서, 시간은 조용히 한자리를 차지해 가는 듯했다.

낙엽은 흩어졌다가 금세 모양을 되찾았고,

그녀의 눈빛도 잠시 흔들렸다가 곧 편안한 자리로 돌아왔다.

여름의 밝음과 가을의 서늘함이 잠깐 한 지점에서 겹치며,

우리가 지나온 날들이 마음속에서 얇게 포개졌다.

나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새로움이라기보다, 오래 남아 있던 믿음에서 오는 잔잔한 울림이었다.

계절은 바뀌었고, 흐른 시간도 길었지만, 그녀를 향한 마음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예전에는 놓치고 지나쳤던 작은 움직임과 표정을 이제는 더 천천히 바라보게 되었다는 정도였다.

길 위에서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람 냄새를 들이마셨다.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는 듯한 공기의 흐름 속에서,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을 새삼 처음 보는 듯 바라보는 감정이 스쳤다.

조용한 순간, 나는 문득 그녀를 다시 발견하고 있었다.

저녁 햇살이 낮게 내려앉고, 길 위 그림자가 길어졌다.

서늘한 바람이 살짝 목덜미를 스치며 여름의 열기와 마주쳤다.

나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걸음을 늦추며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30년 가까이 흐른 시간 속, 사소한 날들의 흔적이 그녀와 나 사이에 묻어 있었다.

그때의 여름, 그 순간의 팥빙수와 작은 웃음, 흘러가는 공기의 온기까지 모두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바람과 낙엽, 햇살과 그림자, 모든 것이 겹쳐져 그날의 기억을 다시 살렸다.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오래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자연스레 이어짐을 느꼈다.

밤이 다가오고 바람은 점점 차가워졌지만, 우리 사이의 시간은 여전히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길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우리는 말없이 그 흐름을 함께 느꼈다.

오랜 시간의 흔적 속에서, 나는 문득 다시 그녀를 처음 보는 것처럼 발견하고 있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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