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

오후 네시

by 조성범

오후 네 시/ 조성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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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 철교를 지나고 있습니다

영종대교는 고속도로와 철도 레일이 다리 하나에 같이 있어요

그래서 기차를 타고 바다를 지날 수가 있답니다

삼백예순다섯 날 중 가끔 오후 네 시의 무료함이 나를 휘휘 내두르곤 하는데

그다지 견디기 어려울 것도 없는 밋밋한 권태로움인데

오늘 일천구백팔십 년대 한강 철교 밑 굴다리에서 술 취한 빗소리가 문득 그리워

섬을 꽁꽁 묶어버린 바다 위 철교를 지나고 있습니다

기차 창밖으로 바다와 뻘밭이 휙-휙 지나갑니다

철교엔 신호등이 없어 멈추지도 않고 지나갑니다. 휙-휙 지나갑니다

조금 있으면 노을이 질 텐데 기차가 쉬지도 않고 지나가 버려 아쉽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이미 어두워진 창밖으로 내 흐릿한 얼굴만 종착역까지 따라붙을 겁니다

사는 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밋밋한 권태로움이 찾아오는가 봅니다

철교를 다 건너도 딱히 갈 곳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매번 그렇거든요

한 번은 내려서 반대편으로 가 다시 돌아오기도 했고

어찌할 땐 그냥 휘적휘적 기웃거리다 돌아오기도 했고

또 가끔은 꼭 그래야 했던 것처럼 어딘가를 기필코 찾아가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 어딘가가 그다지 기억에 남지를 않더라고요

창밖으로 비라도 내리면 낭만적인 기분이라도 들 텐데 하늘이 우중충하기만 하고

종래 비는 내리지 않네요

고추 모종이 작은 화분에서 흰 꽃을 피우고

꽃이 진자리에 고추가 달려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습니다

나는 한번이라도 꽃을 피우기는 했던 걸까요?

꽃 진 자리를 위해 힘껏 뿌리를 내려 보기는 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당신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을 해주지 않는군요

늘 그렇죠

이제는 돌아가야겠네요

벌써 오후 네 시가 다 지나려 하고 있군요

가슴에 고독과 권태로움의 먼지가 풀풀 날리고 있지만

언제까지 투덜거리고만 있을 수 없잖아요

동쪽으로 해 뜨고 서쪽으로 해 지는 날들이 앞으로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걸요

조금씩 조금씩 두꺼워지는 손바닥으로 앉은 자리 꾹 누르고 일어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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