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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범 Jun 04. 2017

시향

노을이 풀잎에게

노을이 풀잎에게 (부제: 딸에게 보내는 편지)/조성범


가파른 골목 끝 계단에 걸터앉아 벌게진 내 얼굴 화난 게 아니란다

그저 쉼 없이 한 계단 한 계단 숨 가쁘게 오르다 보니 붉어진 거지

그래 사실 목이 타 막걸리 한 사발 하긴 했지


새벽 찬 이슬에 젖어든 네 여린 잎 안타까워

어둠 걷히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와

살그머니 보듬어 주고

꽃을 피우기 위해 온 힘을 다 하는 너를 위해

종일토록 나를 불살라라 네 곁을 지켰어


어느 시간엔 심술궂은 바람이 몰고 온 먹장구름에 네 곁을 지키지 못한 적도 있기는 했어

힘이 겨워 먹장구름 아래 주저앉아 있기도 했고

한없이 자유롭던 바람이 부러워 어느 때는 지치기도 했어

그래도 멀리 가진 않았어

네 곁을 지켜야만 하는 내 숙명이기에

나는 또다시 벌떡 일어나 너에게로 달려갔지


또 바람이 한바탕 휘돌아 불고 푸른 달빛 아래

저 담장 밑에서부터 어둠이 찾아들어도

이제 네가 훌쩍 웃자라 꽃을 피우고

소중한 열매 품었으니

붉게 타오르는 이 얼굴 부끄럽지 않단다

오늘이 가고 또 내일이 찾아와도

너를 위해 내 온몸 태울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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