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미러, 돼지를 위한 나라는 없다

오토 배서스트 감독. 블랙 미러 시즌1: 공주와 돼지

by 백승권
불쌍한 돼지


*스토리 노출이 있습니다.






영국 공주가 납치된다. 납치범은 풀어주는 대가로 영국 총리와 돼지의 성행위 영상 온에어를 요구한다. 영국이 뒤집힌다. 협박 영상과 내용을 모두 유튜브에 올려서 이미 만인이 알고 있었다. 대응 매뉴얼이 있을 리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공주가 죽거나, 총리가 돼지와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돼지의 의사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총리를 희생시켜 공주를 구할 것인가. 테러범과 협상을 거부하고 공주를 죽일 것인가. 총리 보좌관이 해결을 위해 대응 마련에 나서지만 발각되어 실패한다. 납치범은 분노하며 공주의 신체 일부로 추정되는 절단된 손가락을 보낸다. 순식간에 여론이 악화된다. 더 이상 옵션은 없었다. 총리와 돼지의 성관계를 피할 수 있는 옵션은 누구 머릿속에도 없었다. 영국 전역이 TV 앞에 모여서 그가 진짜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얼굴은 가렸지만 눈은 뜨고 있었다. 끔찍해하면서도 다들 궁금해하고 있었다. 전 세계 13억 명이 관람한다. 납치범은 자살한다. 공주는 풀려난다.


누구의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사건은 달리 보인다. 영국 정치의 꼭짓점에 있는 총리에겐 적이 없을 리 없다. 다만 이 쇼를 통해 가장 이익을 보는 건 누구인가. 여론과 보좌관에 떠밀려 끔찍한 희생을 한 총리? 위기의 상황에서 총리를 내세워 지지율을 지킨 정당과 보좌관? 어차피 너도 나도 다 퍼 나르는 소식 우리도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보자며 뉴스 속보 시간 편성을 모조리 할애한 방송국? 무료한 일상에 수세기 동안은 회자될 뉴스를 실시간으로 지켜본 시청자? 목숨을 구한 공주? 배경을 제대로 밝히지 않은 예술가? 곤혹스러운 영국을 지켜보는 다른 국가들? 인간 중심의 관점에 대해 잠깐 눈감아 본다.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려 본다. 돼지는 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나?


갑자기 낯선 곳에 끌려 온 커다란 돼지는 진정제를 맞고서 총리를 기다린다. 돼지야말로 인간과 친숙하기로는 소화기 기준으로 보면 개나 고양이보다 훨씬 가까운 존재 아닌가. 돼지야말로 자신의 모든 살점을 인간에게 내어주는 헌신의 상징 아닌가. 인간이 가둬놓고 기르며 식용으로 소비한다는 이유만으로 돼지를 깔보고 더럽게 여기고 추악한 자본가의 상징 등으로 캐릭터화시키는 건 지탄받을 일 아닌가. 돼지고기 전문점 간판에 조리한 돼지고기를 썰며 웃고 있는 돼지 일러스트 캐릭터를 그려 넣는 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만행 아닌가. 저 가학적인 쇼의 또 다른 피해자는 돼지일 텐데 동물보호단체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내가 못 보고 놓친 걸 수도 있다) 돼지의 존엄과 권리를 우려하는 피켓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돼지를 걱정하지 않는다. 블랙 미러 시즌1: 공주와 돼지는 어쩌면 당황하는 상황 속에서 자기 입지만 챙기는데 급급한 인간들을 그리며 최약자 돼지를 돌보지 않는 모습을 비판하려는 것 아니었을까. 관음증과 피해의식에 찌든 인간들의 너절하고 피로한 민낯을 까발리려는 계획 아니었을까. 그날 가장 비참했던 건 총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우린 아직 돼지의 기분을 묻지 않았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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