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쉬 걸, 가장 원형의 인간

톰 후퍼 감독. 대니쉬 걸

by 백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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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잔인하다

둘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 하나만을 가질 수 있고

그마저도 쉽지 않다

둘을 가지려 한다면 잃게 된다

미완의 둘이냐 좀 더 완성된 하나냐

어느 쪽이든 아쉽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삶이란 게

이런 선택의 무한 연속이라

모두 의미를 부여하기엔 너무 피곤하다

모두 기억하기엔 삶은 너무 길고 무겁다

쓰러질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불법과 합법, 도덕과 부도덕,

냉면과 우동,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이런 것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하지만 결정한다

어떤 것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어떤 것은 후폭풍에 감당할 준비를 한다

그러다가 잊는다

다음 선택의 순간이 계속 닥쳐오니까

그런데, 그게 안 되는 선택도 있다

잊는 게 어려운, 아니 불가능한 선택

선택 자체가 모든 것이 되는 선택이 있다

선택이 전부인, 선택 이후

모든 것이 송두리째 뒤바뀌어

선택한 상태로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

그런 선택

타고난 것을 바꿔야 하는 선택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꿔야 하는 선택

이건 살인이 아니고

이건 방화가 아닌데

어떤 이는 살인보다 더 끔찍하게 여기고

어떤 이는 방화보다 더 뜨거워하며 멀리하려 한다

하지만 선택의 기로에 놓인 당사자에겐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회복이고

이건 그저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다

이건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이며

지금까지의 모든 삶은 단지

조금 멀리 돌아온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누가 그럴 수 있나

누가 자기 자신이 되려는 길을 선택할 수 있나

세상 누구도 연극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있는데

누가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포기하고

자기 자신이 되려는 그런 말도 안 되고

고난뿐이며 피곤하고 또는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그런 미친 짓을 하려고 하나

아무도 그렇게 살지 않는다

그런 선택 따위, 자기 자신 따위 포기하고

남들처럼 대충 살아도 숨을 쉴 수 있다

죽지 않는다

굶주리지 않을 수 있고

비난받지 않을 수 있다

의아한 점이라면

지구인이 수십억 명인데

다 그러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두가 절대다수의 암묵적 합의와

나태함에 맞춰

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비장한 대의명분 따위는 없다

그는 그렇게 사는 게 맞다고 선택할 뿐이고

전까지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지만

선택의 일부로 여길뿐이다

이건 내 의사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친구를 잃고

연인을 잃고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사회적 자산을 잃어도

심지어 건강까지 잃고

목숨까지 잃더라도

이게 왜 목숨까지 걸며,

생을 완전히 끝낼지도 모른다는 위험까지 감수하며

그러면 선택도 끝나고 그 이후의 삶과 기억과 모

든 행복과 희망까지 종결되는 건데

그런 선택을 하는지 이해는 하면서도

완전히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이런 생각을 나만 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결단했는지,

2차 수술까지 받으려 했는지

행복한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자신을 끝내야 했는지

남성기를 여성기로 바꾼 것은 어쩌면

어느 날부터 아내의 육체가 아닌 아내의 실크 잠옷에 매혹된 것은 어쩌면

선망하는 여자들의 몸짓을 따라 한 것은 어쩌면

그걸 죽는 순간까지 원하고 변화를 실현한 것은 어쩌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그 아니 그녀에겐 그게

잔인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원형의 인간이기에

그런 본능에 순수하게 이끌렸을 뿐

선택의 영역도 포기할 부분도

아니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녀가 된 그를,

애초 그녀였던 그녀를 단정할 수 없다

그녀는 태초부터 걸이었다

그걸 오직 자신만 알았고

운명에 순응했을 뿐이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인간의 삶을

그 누구보다 완전을 지향했던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다가

그렇게 사라졌다

거리낌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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