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이 글은 유서가 아니다. 광기에 결박당한 채 입에 펜을 물고 쓰는 비밀 편지 정도라고 하자. 요약하면 도망쳐. 매년 시체가 뜨는 입수 금지의 저수지의 초입에 걸어둔 색이 바랜 경고문 같은 것.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이들이 시체들 사이에서 멱을 감고 있어 경고는 한참 늦었다. 경고문을 구상하기도 전에 그들 사이에 (어느새 내가) 끼여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자기가 미쳐 있는 줄 모른다. 나처럼 냉철한 이성을 소유한 자는 없다고 굳게들 섬기고 있다. 사실 모두 알고 나만 모르는 걸지도 모른다. 모른다. 정말 모른다. 어떻게 될 줄 모른다. 어떻게 될지 설계하는 사람들만 알지도 모른다. 알면 지갑을 열었겠지. 알면 인터넷 신용 대출을 알아보고 있겠지. 알면 장기 단가를 쪽지로 물어보고 있겠지. 알면... 알면 뭘 알겠어. 진짜 알면 이런 글 쓰지도 못한다. 며칠 골몰하고 있는 스스로가 웃겨서 기록으로 남긴다.
숫자가 세상을 굴리는 방식을 모른다. 그런 애가 빈칸에 코인의 희망 가격과 수량을 기입한다. 기본 용어도 모르고 차트 볼 줄도 모르고 거래소 이름도 모르고 농협 계좌도 휴면 상태를 풀어야 하는데. 무지의 갭을 줄이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않나. 시간도 필요했고 실수도 필요했다. 돌아가 봐야 다음엔 덜 헤맬 수 있으니까, 라는 미스터리 한 명분. 효력은 없다. 대신 스스로를 발견한다. 초조와 공포 속에서 숫자만 본다. 기회인지 아닌지 따질 시간 없이 레이스에 뛰어든다. 가끔 하늘을 보고 싶지만 천장은 연기뿐이다. 향을 피운 건지 먹구름인지 모르겠다. 지인이 지인의 지인에게서 받은 정보로 매수한 종목이 치솟는 광경을 봤다. 실시간으로 보유자산(평가금액)이 눈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고 있었다. 이 순간은 뇌리 속 지워질 수 없는 장면 명예의 전당에서 무한 재생되고 있다. 그게 시작이었다. 물론 이후 단계의 추진력이 붙긴 했지만 점화는 저 순간이었다. 저런 세상이 있구나에서 저런 세상이 바로 여기 지금이었구나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래 나도 대박 이런 치기 어린 다짐은 누르고 눌렀다. 가입하고 앱을 설치하고 계좌를 연동하고 종목을 골랐다. 그렇게 안구를 저당 잡혔다.
나는 휩쓸리지 않는가. 나는 충동을 컨트롤할 수 있는가. 나는 냉철한 이성과 드높은 지성을 바탕으로 과감한 추진력과 의연함을 갖추고 있나. 시장 상황을 단숨에 꿰뚫는 통찰력과 위급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나.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다 집어치우고 총알이 있나. 아니. 에휴. 가진 게 없으면 잃을 것도 없을 거란 건 시스템이 부재했을 시절 이야기다. 지금은 가진 게 없으면 기관에서 돈을 끌어다가 남은 인생을 베팅한다.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슬롯머신에 1센트씩 넣어보니 조금 땄다는 수십 년 전 영어 교사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최소 금액으로 100군데를 매수할 수도 없었다.(물론 가능은 하겠지) 무엇보다 웃긴 건 안구는 물론이거니와 초반은 뇌의 절반을 거래 사이트에 두고 온 것 같았다. 종목 정보를 읽어봐도 독해 불가였다. 암호화폐 지식이 시간을 무시한 채 단숨에 로딩될 리 없었다. 지식과 경험은 거의 모든 새로운 비즈니스 영역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겠지만 이건, 아니 내 경우는 달랐다. 무엇보다 무식한 느낌이었지 미신적인 확신이 없었다. 조바심만 내다가 눈썹이 하얘질 순 없었다. 느긋하게 기다리지도 못했다. 투자인지 투기인지 떳떳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는 내가 이런 애구나 오랫동안 자각하며 매수 매도 손실 손실 손실을 반복해야 했다.
2주 정도 지난 지금은 어떤가. 새로운 시장에 대한 인지를 조금 얻었을 뿐이다. 디지털은 전기 스위치가 내려간다고 모든 진행이 차단되는 세계가 아니었다. 디지털 화폐는 이미 당도하고 경험이 시작되었으며 세계인을 학습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나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았고 더 수익을 올린 것 같으며 나만 정보가 없나 싶고 그래서 아무것도 늘지 않는 듯 초조해지기도 했다. 정보는 많았지만 내게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미래가 아니라 코앞의 잔고라도 바꾸고 싶었지만 그게 그렇게 쉬울 리 없었다. 가까운 지인들과 대화 소재로 자리 잡은 건 확실했다. 지인의 지인들은 수억부터 수십 억까지 벌었다고 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타인이 될 수 있을까. 꿈이 아니라서 지옥이 바닥에 떨어진 모든 것을 영영 태울지도 모른다. 장이 끝나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고통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쉽게 벌 수 있는 돈에 대한 믿음은 위험하다. 나는 그렇게 미치지 않았으니 건전하게 하면 괜찮겠지라는 다짐은 더 위험하다. 그렇다고 기존 화폐 시장을 뒤흔드는 대혼란 상황을 팔짱 끼고 구경만 할 텐가 라는 우려 역시 지울 수 없다. 생각보다 더 빨리 대다수의 경제 인구가 이 시장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 같긴 하다. 그때가 되면 내 잔고는 얼마일까. 그때라는 게 내 망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