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희 감독. 찬실이는 복도 많지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에요
찬실이 백허그한 순간 영이는 칼 맞은 표정이었다. 찬실이는 이 사랑이 절실했다. 나이 40에 아무것도 없었다. 친구는 소중했지만 평생 친구 집(윤승아) 가정부만 하며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평생 예술 영화만 만들던 찬실(강말금)에게 감독(서상원)의 죽음은 인생이란 영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이었다. 그리고 현실이었다. 스타 피디였나, 아니다. 감독은 죽고 영화 제작은 같이 죽고 찬실은 도려내 지기 바빴다. 도려내진 찬실은 산으로 가야 했다. 산꼭대기 작은 방에서 처음 보는 할머니(윤여정)와 콩나물을 다듬고 자기가 장국영이라고 주장하는 헐벗은 귀신(김영민)과 이야기하며 혼자 자주 울었다. 살긴 살아야겠는데 평생의 업이라 여겼던 영화가 엎어지니 완전히 길을 잃었다. 나이 40인데 아무것도 없다니. 그냥 한번 넘어진 정도가 아니었다. 멘털이 완전히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단편영화감독 영이(배유람)는 빛이자 희망 새로운 영화이자 산소호흡기였다. 평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용기까지 솟구쳤다. 자기 합리화의 달인이 되었다. 그래 나도 새로운 사랑의 주인공이 될 수 있어. 내 인생 내 맘 가는 데로 한번 살아보자. 남들처럼 사람답게 잘 풀리는 시나리오처럼 한번 날아보자.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말이 그렇게 잘 통해서 맘까지 통할 줄 알았던 영이를 와락 덥석 마구 끌어안았던 것이다. 힘을 준 손가락 끝마디까지 요단강 앞에서 망설이는 찬실의 심정을 대변한 듯했다. 찬실보다 몇 년 덜 살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넘어져보고 안 풀려본 영이도 그 심정 헤아릴 수 있었다. 타인의 삶을 극으로 옮기는 직업인데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아무것도 없는 찬실에게 갑자기 나타나 말까지 잘 통하는 더구나 영화라는 인생의 목표까지 같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로 시작하는 연애를 할 수는 없으니까. 영이는 찬실의 인생에 비중 있는 조연처럼 등장했지만 로맨스 남주가 되길 바라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착한 심성 같은데 순하고 매너 있게 거절하는 영이의 말들이 영이의 난처한 심정을 담은 대사들이 찬실의 주요 장기를 공격했다. 아마 그날 일기장에 "X나 쪽팔렸다"라고 썼을지도 모른다. 정성껏 싸 와 다정하게 나눠먹은 도시락이 최후의 만찬이 될지 누가 알았나. 영이를 뒤로 한 채 황급하게 도망치는 찬실의 도시락통이 길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주워야 했다. 이거라도 수습해야지. 찬실은 가까운 곳에 물이 있었다면 다이빙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찬실은 바르고 성실한 삶을 추구해왔고 자기 삶을 아껴왔으니까. 영이에게 고백을 실패하고도 찬실은 계속 밥을 먹어야 했다. 폐기하려던 키노 잡지를 다시 꽂아야 했다. 아무리 읽어도 지루하더라도 계속 계속 시나리오를 써야 했다. 앞서 가는 불빛이 된다면 더 좋았을 텐데 찬실은 깊은 어둠 속 멈춰서 작은 목소리로 기도라도 읊조려야 했다. 앞으로도 찬실의 삶에 구원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르지. 나이 40에 아무것도 없었고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불가능은 아무것도 아닌 게 절대 아니지만 찬실은 살기 위해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살고 있는 건 찬실뿐이 아니다. 물론 찬실은 영화 캐릭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