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악령의 게임판

나홍진 감독. 곡성

by 백승권




음모론은 달콤하다. 뜻대로 풀리지 않는 사건의 모든 빈틈을 완벽히 메워준다. 이성적인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비이성적인 근거들. 인간과 인간, 인간의 사건과 인간의 사건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불가사의한 빈틈을 소문이 채우고 있었다.


곡성. 이 좁고 울창한 시골에서 언젠가부터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이 건너 건너 다 아는 작은 동네에서 가족들이 송두리째 살해당하고 있었다. 누구네 각시, 누구네 남편, 누구네 애들까지. 일본에서 왔다는 외지인(쿠니무라 준). 소문 속에서 그는 산속에서 짐승을 뜯어먹으며 동네 사람들을 강간하고 그와 접촉한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와 자기 가족을 미친 듯이 죽였다. 소문은 처음엔 부정당하다 사건이 풀리지 않자 강한 믿음으로 접착된다.


계속되는 살인. 경찰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경찰은 병신같이 벼락에 놀라고 귀신을 믿고 목에 십자가를 걸며 그 존재를 확신하는 중심에 선다. 외지인이 나타나는 꿈. 그리고 외지인이 등장하면서 퍼져나갔다는 이상한 증상. 어느 경찰(곽도원)의 딸이 같은 증세에 시달린다. 아버지는 가족의 전부지만 딸은 아버지의 전부다. 딸이 보는 것도 모르고 섹스를 하던 부부는 딸이 증세에 시달리자 고통의 근원을 찾아 헤맨다.


소문의 중심에 있던 외지인. 그의 집을 파괴하고 그의 면전에서 고함을 지르며 겁박한다. 모든 것의 관찰자가 되던 여자(천우희)는 경찰의 주위에서 서성거리며 죽은 자들의 옷을 걸치고 있지만 경찰은 모든 변화를 겪으면서도 점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된다.


또 다른 외지인(황정민)의 등장. 그는 먼저 온 외지인에게 보이지 않는 공격을 시작한다. 영화는 마치 둘의 격돌처럼 새의 목을 날리고 피에 젖은 칼과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양쪽의 비명과 고통이 땅과 산을 들썩거리게 한다. 누가 이겼을까. 그건 애초 승부가 아니었다. 한판의 쇼였을 뿐.


서양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이를 찾아가지만 그는 고개를 젓는다.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을 믿으세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밥을 먹고사는 이의 아가리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이제 어떡하나. 경찰의 딸은 나아질 길 없는데. 미끼를 물었다는 두 번째 외지인의 말은 그냥 흘리기엔 매혹적이었다. 어느 누가 미끼를 물지 않고 현혹되지 않았는가. 모두가 풍문을 믿었고 확신을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나. 외지인은 우연히 죽은 듯 필연적인 사고를 당한다. 끝인 줄 알았다. 딸은 괜찮아졌다.


하지만 괜찮아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동료 경찰이 처참한 사건의 다음 당사자가 되었을 때 신의 대리자를 지망하는 청년은 처단자를 자처하며 외지인을 찾아 나선다. 청년에게 외지인은 악마였다. 아니 적어도 악의 대리인이었다. 신의 대리자가 되어 악을 처단하러 온 청년 앞에서 외지인은 신의 아들이 했던 말을 되돌려 준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을 거라며 유쾌하게 낄낄댄다. 실제 악마의 형상인지, 청년에게만 악마로 보이는지 청년은 현혹되었는지 미끼를 물고 삼켰는지 영화는 마지막 페이지를 끝내 열지 않는다.


같은 시간, 딸은 지난 사건들의 당사자들처럼 칼을 들고 가족 앞에 서 있었다. 아비는 울부짖는다. 경찰로서 아빠로서 그는 모든 것에 현혹되었을 뿐 그는 모든 것을 의심했을 뿐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했고 어떤 것도 지키지 못했으며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방황하며 모든 엉망 사이에서 무력하게 어둠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큰 소리만 쳤을 뿐 어떤 곡성도 멈추지 못했고 끝내 다 파악하지 못한 커다란 퍼즐 판에서 아주 작은 일부로서 끼워져 있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믿음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믿음과 실체 사이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믿음은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믿음이 결과를 바꿀 수 있는가


곡성을 보면서 단언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믿음은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것. 퍼져가는 악을 저지시키려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듯 보이지만 인간은 결국 자신이 가진 낫을 휘두르고 자신의 체력만큼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자신의 시력만큼만 보고 자신의 상상력만큼 예측하며 자신의 두려움만큼 공포에 휩싸일 뿐 그렇게 어느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예정된 수순의 일부가 되어 비극을 향해 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이런 영화들이 그렸던 인간과 악의 대결 아닌 대결의 구도는 늘 그랬다. 인간은 비웃음의 존재였다. 목소리만 클 뿐 하찮고 나약해 빠진 벌레. 흥미로운 대상은 외지인이었다. 지금 이 순간조차 곡성이 던진 낚싯바늘에 꽁꽁 꿰어 어느 것 하나 단정할 수 없지만 외지인이 절벽에서 떨어져 몸을 숨기고 고통에 몸부림칠 때 그는 마치 성경 속의 예수 그리스도같이 보이기도 했다.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온 신의 아들.


일본말을 하는 외지인이 악의 대리인이었다면 그는 떨어지는 순간 공중에서 이십 바퀴쯤 돌다가 살쾡이처럼 절벽을 타고 올라갈 수도 있었겠지만 일본 승려의 낡은 외피를 입고 있어서 그랬는지 그는 마치 실제 인간의 온갖 고통을 체감하듯 심하게 아파한다. 그때 그는 정말 인간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또한 현혹시키려는 수작의 일부인지 알지 못해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증언과 회상에서 등장하는 악의 형상을 모두 인간의 두려움과 공포가 만들어낸 판타지의 일부라고 배제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어느 편에 서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다만 어느 편에 섰더라도 막을 수 없는 비극이었고 어느 편에 서지 않았더라도 막을 수 없는 죽음이었다는 걸 내가 잘 알겠다.


가장 최악의 가설로 몰아간다면 승려와 신부와 무당이 곡성이라는 한 동네를 게임판 삼아 모조리 살육하기로 했다는 것. 인간은 그래도 되는 존재라고 전제했다는 것. 인간은 그 정도 수준으로 다뤄도 되는 그저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도록 망가진 후에 주저앉아 울기 밖에 못하는 하등한 대상으로 치부되었다는 것.


곡성이라는 게임판.

인간이라는 말들.

죽음이라는 놀이.

믿음이라는 마약.


시체의 살점을 파먹는 까마귀는 가족을 도륙하는 인간보다 차라리 신성하다. 인간은 애초 악령에 미치지 않아도 가족을 죽이는 족속들. 인간은 인간의 말을 믿어선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죽은 자를 영영 쓰러뜨리지 못해 죽은 자에게 뜯어 먹히는 나약함이 모두가 쓰러질 때까지 나아질 리 없으니까. 인간이 아닌 것들이 이를 가장 잘 알고 인간을 자처하는 것들이 이를 가장 모르기에 곡성은 그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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