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남자, 목사부부의 가난과 신의 무관심에 대하여

강동헌 감독. 기도하는 남자

by 백승권

태욱(박혁권)은 개척교회 목사다. 쫓겨나기 직전의 임대한 낡은 건물, 적은 신도, 누추하고 적막한 예배당, 마땅히 같이 살 거처가 없어 아내 정인(류현경)과 두 딸과 떨어져 자는 신세, 빚이 있고, 가족 병원비 0.5억이 더 필요한 상황, 종교인은 무엇으로 살아남아야 할까. 고난은 아무도 비껴나가지 않는데. 태욱은 텅 빈 껍데기처럼 보였다. 오랜 가난과 고난으로 검게 얼룩진 눈빛과 표정, 처진 어깨, 무거운 걸음은 점점 더 느려져만 갔다. 기독교 쪽에는 흔히 큰 믿음엔 그에 비례하는 큰 고난이 따른다 라는 속설이 있다. 큰 믿음엔 큰 유혹이 따른다는 말과 같이 쓰이기도 한다. 철없는 소년을 스파이더맨으로 각성시킨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와 비슷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런가. 그렇게 정당화시킬 수 있나. 고난은 설화와 환상이 아닌데, 허기와 피로, 좌절과 절망, 우울과 낙담, 닦달하는 건물주를 피해 다니다가 쌍욕을 처먹는 일인데, 삐쩍 마른 아내와 아이들의 그늘을 매일 마주하는 일인데, 무력감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일인데, 늘어가는 빚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일인데, 그래... 내 믿음이 이토록 뜨겁고 고귀하여 고난이 쉼 없이 뒤따르는구나... 이걸 감당하는 것이 구원으로 가는 길이요, 선택받은 자의 순리와 운명이다... 이게 다 그분의 깊고 넓은 뜻이요 계획일 것이다... 이렇게 여길 수 있나. 죽을 때까지 자아를 분쇄시켜 허상의 메아리에 스스로를 속일 수 있나. 가족과 모두가 돈이 없어 허덕이다 죽을 때까지?


태욱은 머리를 조아린다. 자신이 욕했던 목사의 아들 앞에서. 제발 돈 좀 빌려달라고 빌고 거절당하자 협박한다. 충동적으로 생판 모르는 자에게 다가가 살인을 계획 및 시도하기도 한다. 돈이 필요했다. 유혹에 졌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아이고 우리 목사님이 어쩌다 저런 짓까지... 그래도 어서 회개하고 주님 곁으로 돌아오셔야 할 텐데... 이런 식으로 볼 수도 있다. 태욱의 수많은 선택이 여기까지 오게 한 걸까. 크게 키우려는 주님의 뜻일까. 고난 테스트를 통과하라고, 주차장에 숨어 있다고 돌로 타인의 머리를 내리치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명령하셨을까. 태욱은 이러고도 주일에 다시 성도들 앞에서 성경을 읊조릴 텐데. 태욱이라는 인간과 태욱의 삶, 가족의 삶은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수습하려 할수록 걷잡을 수 없었다.


엄마도 살리고 모두가 숨쉬기 위해, 정인도 어떻게든 돈을 구하고 싶었다. 몸을 팔면 원하는 금액을 구할 수 있다는 유혹이 닥친다. 친구는 그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한 듯했다. 성경을 찾을 것도 없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이지만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 안된다. 그런 입장에 서지 않고서는 누구도 정인을 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인은 스스로가 얼마나 지옥 같은 상황의 중심에 서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다 죽지 않으려면 수가 없었다. 뿔 달린 악의 화신이 아니라 멀쩡한 인간이 눈앞에서 돈다발을 흔들며 유혹하고 있었다. 태욱이 알아차렸지만 저지할 수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정인에게 신앙은 장애물이었다. 믿음이 없었다면 덜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목사 부부는 삶이란 감옥에 갇혀 있었다. 신은 면회 오지 않았고 꺼내 주지도 않았으며 고문당하고 형장으로 향하는 걸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구경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의심을 반박할만한 증거나 정황을 찾을 수 없었다.


태욱은 벽에서 십자가를 떼어버린다. 울부짖으며 신을 저주한다. 그가 믿은 신의 계획이 무엇이었든 태욱의 계획은 이미 그를 씻을 수 없는 범죄자로 만들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미칠듯한 충동에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낮고 깊은 곳에서 세포 하나하나 물들어가며 태욱은 자신이 만인에게 전파했던 종교적인 삶에서 가장 극단적인 반대편에 서서 피를 묻히고 있었다. 살인을 계획하고 있었다. 곁에서 피흘리며 죽어가는 자를 방치하고 있었다. 사람이 아닌 돈을 선택하고 있었다. 가까운 자를 죽이고 그의 보험금으로 유족들이 먹고사는 게 신의 뜻인가. 모든 삶은 힘들고 목회자의 삶도 다르지 않다가 메시지인가. 기도는 누굴 향하고 있었나. 기도할 시간에 남들과 비슷한 직장 출퇴근했다면 더 나았을까. 가난은 더 큰 가난을 고난은 더 큰 고난을 부르지만 태욱의 기도는 끝까지 신의 도움을 소환하지 못했다. 이게 다 신의 뜻인가. '어린양들'의 고난을 방치하는 게 신의 뜻이자 역할이라면, 신이 굳이 필요한가. 인간의 자유의지가 모든 비극을 초래했고 신은 구경만 했다면 신은 그저 CCTV만도 못한 존재 아닌가. 믿는 자들에게 거하는 신은 믿는 자의 고통을 처절하게 외면하고 있었다. 신을 (돈벌이로) 도구화하는 자만이 여유로이 웃고 있었다. 신의 도구라고 스스로 여겼던 자들은 모두 현생의 지옥불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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