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캠피온 감독. 파워 오브 도그
거대한 산맥과 끝없는 평원, 글로 써서 상상을 유도하기엔 너무 초라하다. 원거리의 자연은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시야를 벗어난다. 땅에 발을 딛는다고 한눈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곳은 문명의 지문이 뒤덮이기 전의 이름 없는 행성과도 같다. 인간이 닿기 어려울수록 아름답다. 기이할 정도로 숨이 멎을 정도로 거대하고 숭고하며 거룩하기까지 하다. 움직이는 얼룩 같은 인간들이 말을 타고 속력을 낸들 아무것도 따라잡을 수 없다. 그저 먼지처럼 나부낄 뿐이다. 자연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거슬리면 소멸시킬 뿐. 소수 인간들의 싸움은 자연에게 어떤 관심도 끌지 못할 뿐이다. 다만 추억이 깃든 곳곳에서 인간은 상념에 빠지고 서로를 상처 입히며 괴로움과 외로움에 울고 닮은 사람을 만나 남은 생애를 약속할 뿐. 자연은 말없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이 나타나기 전부터 사라진 이후에도 영영.
자연이 인간의 정신과 행위를 신경 쓰지 않듯, 그런 자연을 인간은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다. 경외와 두려움을 지니고 숙일 수 있지만 무리들끼리 몰려다니며 행패를 일삼기도 한다. 기원을 알 수 없는 거만함, 명령과 복종이 당연한 관계, 단 두 가지로만 인간의 성별과 역할을 고정시켜버리는 우둔함, 남성 같은 여성, 여성 같은 남성이라는 갈등 요소를 창조하고 후자를 더 멸시하고 조롱하는 시대와 분위기. 동물의 등에 올라타고, 동물의 발버둥을 저지하며 거세하는 일상, 가죽을 벗겨 말리는 낮, 맘에 안 드는 이들과 (필요 없는 물건이라도) 거래하지 않는 사연 있는 듯한 옹졸함, 무례가 권력인 곳에서 필 버뱅크(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왕이었다. 흙색의 옷을 걸친 무리를 이끌며 과거의 연인을 칭송하고 우상화시키며 슬퍼하고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깨끗한 옷을 입은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아웃사이더. 하지만 늑대 같은 이들을 이끄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충성과 신뢰를 얻고 있었고 아무도 그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필 앞에 나타난 피터(코디 스밋 맥피)는 늑대 아가리에 들어간 토끼와 같았고 필에겐 자신의 남자다움과 강인함을 드러내는데 손색없어 보였다. 피터가 필의 작품(종이로 세공한 꽃, 또는 로즈)을 불태우며 (계집애 같다고) 조롱한 날, 피터의 엄마 로즈는 오래 울었다.
로즈(커스틴 던스트)가 조지(제시 플레먼스)와 결혼한 건 사건이었다. 조지는 필의 동생이었기에 졸지에 가냘픈 남자애와 식당 주인을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필은 거칠게 거부한다. 조지는 자신이 없었으면 사람 구실도 못했을, 수십 년을 곁에 둔 가족이었고 책임과 의지의 대상이었다. 조지의 결혼은 필에게 시간의 분리와도 같았다. 견디기 힘든 허망함, 조지는 겨우 필이라는 감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 늘 필과 함께였지만 외롭지 않은 적이 없었고 로즈를 만나며 감격에 벅차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로즈 역시 조지가 있어 아들 피터를 챙길 수 있었다. 필은 이 모양새를 증오했다. 새로운 집안에 들어온 로즈와 피터를 괴롭히고 적응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로즈는 알콜 중독에 빠지고 피터는 필과 가까워진다. 피터는 웃는다.
피터의 섬세함은 상식의 선 너머에 있었다. 놀라움과 경이로움이 내포되어 있었다. 종이로 진짜와 같은 꽃을 만들고 토끼의 배를 갈라 정성스럽게 내장을 꺼내 옮겨 그리기도 했다. 말 타고 소 몰며 먹고사는 곳에서 피터는 깨끗한 옷만큼이나 생경한 캐릭터였다. 피터와 거리를 좁히며 과거 연인의 환생을 느낀 필은 점점 피터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지식과 경험을 권한다. 줄이 엮일수록 줄의 거리도 가까워진다. 눈빛이 닿고 몸이 닿는다. 로즈의 알콜 중독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필은 몸이 검어지고 있었다. 산길에 누웠던 소의 가죽을 닮은 옷으로 필은 갈아입는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다.
피터가 필에게 말한 아빠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가 진실인지 알지 못한다. 그 이야기로 인해 필이 피터에게 어떤 연민 비슷한 걸 품게 되었다는 것뿐. 필이 피터에게 대안 아버지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뭔가를 가르쳐주고 거칠게 함께 놀며 거친 서부를 살아내는 남자다움을 훈련시켜줄 때 둘은 친밀해 보였다. 하지만 피터에게 (큰 키에도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타입이었으나) 영향을 미칠 남자 어른은 필요 없었다. 엄마, 그저 엄마만 괜찮으면 그만이었다. 엄마만 곁에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고 엄마가 울면 그때가 지옥이었다. 피터에게 필은 지옥에서 온 사자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방식으로 형벌을 내려야 했다. 엄마와의 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누구에게도 계획을 발설하지 않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추진해야 했다. 운과 우연이 얼마나 작용했을까. 다음은 누가 될까. 피터는 토끼의 배를 가를 수 있고 토끼처럼 자신의 품 안에 들어온 자라면 누구든 같은 운명으로 만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