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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Feb 11. 2022

로마서 8:37, 어린양을 겁탈한 목자

신영식 감독. 로마서 8:37

개신교 교회에서는 흔히 예수는 목자, 신도는 어린양으로 비유한다. 그리고 예수가 가시적 물리적으로 나설  없다는 점을 이용해 인간 목사가  자리를 대신한다. 신의 대리인, 신의 사자, 신의 말씀을 전하는  등등으로 지칭할  있으며 실질적으로 교회라는 대형 커뮤니티에서 가장 막강한 지위와 권력을 지닌 우두머리다. 교회를 그저 신과 대화하는 절대자에게 간청드리는 성스러운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편하겠지만, 쉽지 않다. 무리를 이뤄 끊임없이 교류해야 하며 시스템상 목사라는 지위의 휘하에 편입되어야 한다. 회사 조직도와 같다. 규모에 맞는 안정적 운영을 위해라는 취지가 있겠지만 지위를 구분하고 역할을 부여하며 상호 작용을 해야 하는 이상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은 조직 생활과 많은 부분이 겹친다. 그리고 회사 같은 조직 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교회 내에서도 빈번히 발생한다. 다만 신과 성경을 따르는 신앙공동체라는 암묵적 동의 하에 많은 부분들이 개인적으로 감내하거나 모나지 않게 넘어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인간은 각자 개개인의 역사와 문제를 지니고 있고 인간이 섞이면 문제들도 같이 섞인다. (교회는) 주일을 기준으로 수많은 예배와 모임이 이뤄지고 이를 위한 수많은 인원과 준비할 것들이 갖춰지며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작동되어야 한다. 역할을 직업으로 삼은 자와 자원봉사 형태로 참여하고 있는 이들로 나뉜다. 모두에게 열려있다고 하지만 철저하게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다. 숫자와 행사를 다루며 보통의 회사 업무처럼 돌아간다. 신규 유입은  환영이고 신도들이 늘어갈수록 목사의 영향력과 권위도 높아진다.  담고 있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신도들 간의 유대는 유사가족처럼 형성되기도 한다. 정서적 의지를 바탕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모이다 보면 나중에는 삶의 절대적 일부가(까지) 된다. 인간관계, 체류시간, 함께한 경험까지 교회 내부에서 형성한 삶이 일부 신도에겐 삶의 절대적 비중으로 차지한다. 태어나 학교 다니고 성인에 이르기까지 거주지가 급변하지 않는 이상 교류와 유대는 쉽게 끊기지 않는다. 이런 환경에서 목사는 셀럽이다. 정신과 영혼의 틀을 만들어 이끄는 신의 대리인, 신이 주는 위안을 전하는 사람 아니  이상, 선택받은 . 교회는 사람이 모이도록 유도하는 곳이고  중심엔 목사가 있다. 목사와 신도가 엉키게 된다. 일정한 선과 간격 안에 유지되었다면 이게 상식이자 보편이었다면 뉴스 헤드라인은 지금보다 잠잠했을 것이다. 교회의 이미지는 달랐을 것이다.    줄에 목자와 어린양이라고 했나. 목자와 어린양이라는 온유하고 평화로운 이미지의 관계도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신을 의심하는 자들을 돌아보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현재가 그런가. 목자가 어린양을 강간하고 있었다. 미친 소리 같다. 목자, 어린양, 강간  셋이  문장에 같이 배치될  있는가. 남성 목사가 여성 신도를 강간했다. 신의 사자라고 추앙받으며 스스로 지칭하는 자가,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치며 천국을 약속하던 자가, 시종일관 존경과 대우를 온몸으로 받았던 절대적인 책임자가, 만인이 믿고 의지하고 섬겼던 신의 대리인이. 부순교회 남성 목사 요섭(서동갑) 헤아릴  없는 수의 여성 신도들성폭행  성추행했다.


목사는 현실에서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대상과 그의 영향력을 마치 곁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만인이 공감할 수 있는 수준까지 표현하고 묘사하고 설득하고 외쳐가며 격렬한 리액션을 이끌어내는 자다. 개인과 다수 앞에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고 확신을 안겨 줄 수 있도록 수많은 훈련을 거친 자이다. 교회 안에서 그를 거스르려면 신에게 선택받은 자에게 저항했다는 식으로 달려드는 비호세력들의 거센 반발을 각오해야 한다. 목사는 교회 안에서 유일한 자이자 상징, 신의 꼭두각시가 아닌 신을 방패 삼은 권력자일 수 있다. 목사 요섭은 그런 자신의 유리한 지위를 영혼 깊숙한 곳까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신을 향한 자신의 충성을 연기할 수 있었고 교회 내 누구에게든 가장 낮은 봉사자와 가장 높은 권력자의 지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수많은 청년 신도들을 길들이며 은밀히 불러냈고 인간의 나약함 어쩌구 개소릴 떠들어가며 추행과 겁탈을 자행했다. 그에게 당한 신도들은 당한 후에도 그를 향한 동경과 신앙을 잃을까 두려워했다. 신을 소개해준 절대 권력자에게 외면당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단숨에 도망치지 못했고 다시 또다시 물어뜯겼다. 목사 요섭의 비호세력은 이를 알면서도 은폐하기 급급했다. 인간으로서의 한계, 우리 모두가 죄인, 실수 이따위 개소릴 떠들어가며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저지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목사를 보호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목사 지위를 상실하지도 수갑을 차지도 방송에 폭로되지도 않았다. 목사 요섭 무리들을 꺾으려 날 선 비판과 공격을 일삼던 상대 목사 무리들 또한 이때만큼은 대통합을 이뤘다. 목사 요섭에 대한 연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의 추악한 과거를 알던 사람들은 죽거나 사라졌다. 그를 목사가 아닌 그저 성도착 미치광이로 분류하면 맘이 편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목사다.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남성 목사들이 여성 신도들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목사는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말씀을 전하다가 따로 부를 것이다. 교회 시스템 안에서 도망갈 곳은 없다, 모두가 목사 편이기 때문이다. 목자가 어린양들을 겁탈하더라도 이미 길들여진 다른 어린양들은 아랑곳없이 (목자를 보호하고 피해자를 공격하며) 목자를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로마서 8:37은 이 과정을 보여준다. 로마서 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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