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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Feb 08. 2022

지금 우리 학교는, 세월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

오일남의 "이러다 다 죽어"는 예언이자 경고였다. 어른들이 돈 걸고 살인하는 게임에서는 그나마 호소력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다가 개죽음당했다. 지금 우리 학교에서는 어떤가. 학생들은 돈과 목숨을 걸고 게임을 하지 않는다. 대입 준비하기 바빴으니까. 그러다 한 과학자가 게임 시작 버튼을 누른다. 오징어 게임 때보다 난이도가 더 높아졌다. 수만 명의 좀비 떼와 열명 남짓 학생들이 사투를 벌인다. 대결이 아닌 도망이다. 도망가도 죽고 죽으면 좀비가 된다. 좀비는 무덤에서 방금 나온 귀신과 유령이 아니다. 엄마, 아빠, 동생, 친구다. 엄마, 아빠, 동생, 친구에게 돌아가려고 도망치고 있었는데 그들이 사람을 뜯어먹는 괴물이 되어 달려든다. 그들을 죽여도 이미 죽었고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초유의 재난 상황이 터졌는데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는다. 또는 구하러 왔다가 아무도 구하지 않고 돌아간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에도 그랬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때도. 


어른들의 포기는 다 이유가 있다. 이유는 항상 있었다. 좀비 바이러스 만든 것도 이유가 있었고 학교폭력 피해자를 외면할 때도 다 이유가 있었고 구조헬기 띄웠다가 그냥 돌아갔을 때도 다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가 있어서 학생들이 다 죽어도 할 말이 있었다. 지금 우리 학교의 학생들은 빠르게 학습한다. 어른들을 믿으면 안 되는구나.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구나. 학생이 선생의 내장을 물어뜯어 섭취하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학생들이 죽어나갈 때 그는 고개 돌리며 어쩌면 다 니 탓이라고 2차 가해를 아무 생각 없이 귀찮아서 저 하나 살자고 저질렀다. 선생은 죽으며 뉘우쳤을까. 아니, 왜 나한테만 그래, 나만 이러는 것도 아닌데. 매우 억울해했을 것이다. 이런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학생들은 모든 순간이 한계였다. 한계는 끝이었고 끝과 마주할 때마다 동료들이 죽어나갔다. 같이 살자던 친구들이 줄고 있었다. 비장한 죽음은 없었다. 살점이 뜯기는 고통과 비명의 피범벅 속에서 속절없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학교 외부에서는 통제가 필요했다. 학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해 학생들이 바깥어른들을 죽게 할까 봐. 계산은 쉬웠다. 최대 다수가 아닌 최소한을 살리면 그만이었다. 결정 자체도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고 합리화했다. 그래서 다 죽이라고 결정하고 자신도 죽었다. 학생들은 좀비에게 쫓기다 물려 죽었고 어른 한 명은 죄책감에 쫓기다 스스로 죽었다. 학생들은 죽기 전에 수없이 물리적인 실체를 지닌 죽음과 싸우다 죽어야 했고 어른 한 명은 책임감과 싸우다 죽었다. 비교가 불가한 죽음들이었다. 그리고 난 그 책임자의 죽음이 책임 회피와 또 다른 도망처럼 보였다. 


살아남은 학생들은 새로운 희망이 아니었다. 새로운 절망에 가까웠다. 지옥의 학교에서 살아남은 이후에도 먼저 죽어간 자들과 마주하며 생을 이어가야 했다.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되었지만 바이러스는 누군가의 몸에 남아있었다. 친구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언젠가 깨어질 환상이었다. 먼저 죽은 친구들은 다 죽이려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모두 살아있을 적에도 학생들은 서로를 멸시하고 공격하고 죽이고 있었다. 바이러스가 퍼지자 보다 가시화되었을 뿐이다. 바이러스는 사람보다 사람을 평등하게 대했다. 골라서 죽이는 게 아닌 모조리 죽였으니까. 다 죽어가는 중에서도 학생들은 서로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며 서로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안간힘을 쓰며 만들고 있었다. 저런 학생들을 구해내지 않았던 2014년 4월을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장면들이 세월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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