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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Oct 29. 2021

디바, 잘 추락해야 이기는 게임

조슬예 감독. 디바

경쟁의 난감한 점은 의식하는 순간 벗어날 수 없다는 거다. 대상이 사라져도 그 자리는 다른 대상으로 바로 채워진다. 사람이 사라지면 허상으로라도 채워지게 된다. 사회와 관계 안에서 (1등과는 다른) 정점이라고 여긴 지점에 올라간 적이 없는 것 같아 적확히 묘사하긴 힘들지만 떨어질 것 같다. 미온의 초조함. 시간이 지나면 순위는 바뀐다. 가끔 초등학교 성적표가 생각난다. 전과목을 거의 다 맞은 애들이 시험 때마다 번갈아 자리를 바꾸곤 했다. 수천 명이 되는 학교는 아니었지만 그 순위권에 나도 있었다. 다른 종류의 수상 건수도 있어서 성적이 아니더라도 아침 조회 시상식 때 종종 이름이 불리긴 했지만...(왕재수네) 시험 본 기억은 없어도 성적표에 대한 기억은 있다. 1등은 (내가 당연한 줄 알았는데) 바뀌는구나.. 같은 학습을 했었다. 노력이 좌우하는 시장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고 이후 중학교에서 휘청이고 고등학교로 올라가며 내 학교 성적은 순위권에서 완전히 증발했다. 하여 수치화된 경쟁을 의식해본 적이 없다. 목표가 없진 않았지만 현실과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다. 대학생? 사회인? 그땐 등수와는 다른 구도였다. 초등학교 성적표가 기억이 난 건 상장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수북이 쌓였고 가끔 들여다봤다. 뭔가를 잘하면 이런 걸 주는구나. 글을 쓰면 쓸수록 (외부 환경과의) 치열한 경쟁의식에 대해 자전적 이야기를 쓸 거리가 없다는 걸 알겠다. 하지만 경쟁은 오직 타인과 외부하고만 하는 건 아니니까. 이 문단의 첫 문장을 다시 써본다. 경쟁의 난감한 점은 자신을 의식하는 순간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거다. 

 

나와 경쟁자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코치와 조언자, 친구, 나, 경쟁자, 협력자가 모두 한 몸에 들어있기도 하다. 몸만 하나일 뿐 서로 다른 의견으로 자주 싸우고 계속 부딪히며 끝내 합의되지 않는다. 몸은 맘대로 되지 않고 맘은 엎어진 1000피스 퍼즐판이 되어 선과 면을 찾기 바쁘다. 하나의 몸을 하나의 유리병이라고 한다면 그 안의 내용물들이 서로 다른 색이라고 한다면 결코 균등하게 나눠지지도 예쁘게 섞이지도 않는다. 밀도와 비중이 다르고 질감과 끓는점이 다르며 온통 섞이면 산업폐기물처럼 변한다. 유해해진다. 피부 밖으로 뿜어 나온다. 외부의 경쟁 상황이 없어도 내부의 불일치가 허상의 괴물을 이미지로 형성해 싸우게 만든다. 괴물은 지울수록 또렷해지고 죽일수록 강력해진다. 내 안의 내가 내 안의 서로 다른 나들을 이기려고 안간힘을 쓴다. 발악을 한다. 초반엔 좋은 관계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된다.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걸. 현실의 나는 내면이 만든 허상의 나와 싸우고 결국 허상이 현실을 뒤덮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나가 육체와 정신을 지배한다. 그때부터 새로운 나는 깊은 어둠을 끌어올린다. 내가 깨뜨린 머리, 내 실수로 추락하는 자동차, 나 살기 위해 뿌리치는 손, 나 살기 위해 널 죽이려고 뻗는 발차기. 내가 어떻게 살아남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진실과 마주하게 만든다.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승부, 잘 떨어져야 이기는 게임, 정신이 육체를 뒤흔들고 콘크리트와 물속 안에서 최고가 되기 위하여 불법 약물을 삼킨다. 환영과 환청에 시달리고 그래도 난 끝까지 착한 사람이었어라는 자기기만에 빠지며 가끔 추억 회로를 돌리며 어린아이의 꿈을 꾸지만 직시하게 된다. 한 번 떨어지면 물속으로 수직강하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점수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걸. 환호인지 비명인지 남은 건 타인들의 평가라는 걸. 내가 선택한 걸까. 남이 올려준 걸까.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길 없어도 난 계속 올라가 올라가 추락하고 추락하고 머리가 깨지고 친구가 죽어도 추락해야 한다는 걸. 이영(신민아)은 수진(이유영)과 배니싱 트윈(vanishing twin. 임신 중에 쌍생아 가운데 하나가 모체에서 부분적으로나 완전히 사라지는 태아 .쌍둥이 소실(쌍생아 소실), 태아 흡수(fetal resorption)라고도 함)과도 같았다. 한때는 같이 추락하는 재미로 어울려 지냈지만, 결국 하나를 죽여야 하나만 꼭대기에 오른다는 걸 알게 된 사이. 싸우는 법을 스스로 알게 된 게 아니었다. 가르쳐 준 사람이 있었고 가르쳐 준 사람과 경쟁하게 되었으며 가르쳐 준 사람을 죽인 후에야 남은 1인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이 씁쓸할 뿐이다. 이영은 앞으로도 계속 수진과 경쟁할 것이다. 자신을 수진처럼 파괴해버릴 새로운 1등이 나타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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