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런 하워드, 자레드 부시, 채리스 카스트로 스미스 감독
당연한 것들을 의심할 때 인간은 성장한다 믿는다. 시야는 깊어지고 사고의 영역은 넓어진다. 무료 일리 없다. 고민과 고통, 저항과 상처가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주어진 것들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제자리에서 제자리걸음만 하는 삶의 여정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제자리에서 자신의 위치가 폭풍의 눈인지 무중력 공간인지 파악하는 것조차 쓸데없이 여겨지는 삶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이는 삶, 고민 없어 보이는 삶, 콜롬비아 엔칸토 마을의 미라벨은 그런 삶이 늘 부러웠다. 언니들의 삶이었다. 어릴 적부터 거대한 힘과 완벽한 매력을 지닌 마법을 지닌 삶. 심지어 낳아준 엄마까지 음식으로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할머니부터 막내 동생까지 온통 마법사 집안에서 자란 여성에게 마법이 없는 운명이란 그야말로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들었다. 고난이자 고문이었다. 집안 어느 누구도 자신과 같지 않았다. 자신 같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재능 없는 자는 몸과 맘이 늘 바빴다. 미라벨은 자신이 속한 가장 거대하고도 복잡하며 유일한 조직인 가족에게 보탬이 되고 인정받는 것만큼 생의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가족 내에서 인정받는 길은 단 하나였다. 마법이 있느냐 없느냐.
엔칸토 마을은 애초 마법의 기적으로 인해 생사 여부가 결정되고 터를 닦았으며 하나의 가족을 넘어 수많은 정착민을 유입시켜 가구와 영토를 늘린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미라벨 집안의 마법은 할머니로부터 시작된 이 마을의 시작과 끝, 핵심이자 전부와도 같았다. 미라벨 집안의 리더 지위 존속과 만인의 희망과 존경을 잃지 않도록 하는 동력이었다. 마을을 세운 할머니에게 이 마을에서 차지하는 가문의 존재감과 이 존재감을 영속시켜주는 마법의 의미는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죽음보다 더 사랑했던 남편의 희생에서 기적이 시작되었고 이 마을과 가문은 곁에 없는 남편을 향한 그리움이자 애도, 자신이 (남편 대신) 왜 생존해야 했는지 증명해내야 하는 과정과 결과물의 총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라벨의 무능력(마법 없음)은 절망이었다. 가문의 위기로 직결되는 신호탄이자 이미 짧아지고 있는 심지와도 같았다. 심지의 끝에는 지금껏 이룬 모든 것을 파괴하는 폭탄이 있었다. 미라벨이 처음도 아니었다. 미라벨 이전에 다른 가족 구성원은 (가문의 위기를 예언했다는 이유만으로) 철저히 외면당하듯 사라져야 했다.
미라벨이 느끼는 가족 안에서 느끼는 절망은 가족을 향한 사랑의 질량과 정확히 비례했다. 가문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문제를 없애 버리고 싶었다. 영웅이나 구원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닌 그저 사랑하는 가족을 구하고 싶었다. 미라벨은 영악하지 않았고 그만큼 저돌적이었으며 타협하지 않았다. 모든 방법을 닥치는 대로 간구했다. 그 과정에서 언니들의 생소한 고민과 마주한다. 거대한 힘의 마법을 타고났다는 이유만으로 더 큰 힘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자신의 가치를 타인에게 증명해야 하는 삶, 절대적인 매력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레벨에 맞는 상대와 강제 결혼해야 하는 삶, 미라벨은 언니들의 진실을 실토하고 자유를 쥐어주고 싶었지만 오랜 침묵과 인내로 견지해 온 불문율은 쉽게 훼손될 수 없었다. 악법은 악법대로 탄탄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고 기존 질서를 뒤흔들려했던 미라벨은 더 극심한 배척에 시달려야 했다.
미라벨을 가시적으로 적대시하는 가족 구성원은 없었다. 다만 자신들과 다른 무능력자니 사려 깊게 대하면서도 중요한 자리에서는 고요하게 제외시킬 뿐이었다. 파티 날 가족사진에 미라벨은 빠져야 했다. 그 사진 안에는 오직 마법을 가진 가족 구성원만 플래시 앞에서 자리를 잡고 웃을 수 있었다. 이런 미라벨의 시련을 보면서 저렇게 2루타성 공격을 9회 말까지 가는 내내 맞았는데, 마지막 타석에서 만루홈런을 친들 만회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과연 스코어 역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긴 시간 가족이 가한 고통과 균열이 단숨에 (짠! 이제 불행 끝, 행복 시작이야! 같이) 역전되는 건 디즈니 만화가 줄 수 있는 위험한 미신 아닐까. 이걸 보면서 아이들은 캬... 콜롬비아 숲 속이든 대한민국 한복판이든 역시 인생은 한방이구나... 를 짜릿하게 학습하는 건 아닐까. 같이 본 도로시는 웃고 소리 지르고 끊임없이 마주 보고 떠들며 즐거워했다. 범접하기 힘든 진지한 표정을 가만히 짓고 있기도 했다. 미라벨 가족은 화해하지만 도로시는 더 이상 무조선 해피엔딩 식의 결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가혹한 인정 욕구에 허덕이다가 끝내 마법을 발휘하게 된 날, 세상을 평창 동계 올림픽 불꽃쇼처럼 물들이던 미라벨의 심정은 어땠을까. 불꽃이 터질 때만 자신을 봐주는 가족들에 대한 서운함이 박박 지워졌을까. 할머니의 사연은 쓰리고 서글프지만 손녀가 모조리 헤아릴 필요는 없다. 할머니는 자신이 손녀에게 저지른 오랜 학대에 대한 사과를 하고 미라벨은 가족의 인정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엔칸토 바깥 지역에서 새롭게 배워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해석과 대안은 디즈니 식이 아니다. 도로시와 내가 사는 시공간이 만화 속이 아닌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