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웰시 감독. 블랙 미러 시즌1: 당신의 모든 순간
처음 사귄 사람과 처음 결혼할 확률은 높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첫사랑과 결혼했다" 라는 스토리 라인이 만고불변 드라마와 영화의 주요 소재인 것은 현실에서 이뤄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결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n번째 만난 사람과 결혼한다. 그럼에도 내가 몇번째야 라는 질문은 쉽지 않다. 더 적은 연애 경험을 거친 결혼에 암묵적으로 가치를 부여한다. 오픈 여부는 결혼 당사자들이 합의할 부분이다. 평범한 부부 사이의 공기가 기묘해질 때가 있다. 결혼 전 몰랐던 성격이 결혼 후 이빨을 드러낸다. 숨만 쉬어도 좋아 다 참을 수 있던 시절도 있었지. 지금은 아냐. 그럴 수 없어. 솔직히 말해. 내가 몇 번째야. 그동안 만난 사람이 몇명이야?얼마나 깊이 만났어? 얼마나 많이 잤어? 지금도 그 사람 생각해? 혹시 나 몰래 만나? 자꾸 떠오르고 그리워? 돌아가고 싶어? 괜찮아. 화내지 않을 게. 말해봐. 응? 어서 말해보라니까? 하루가 멀다하고 사랑을 고백하던 인간이 갑자기 만취한 개새끼가 되어 물어뜯는다.
궁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캐지 않는 건 그게 내가 선택한 삶과 사람에 대한 기본 예의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도 많다. 말하기 힘든 이유도. 넷플릭스 오리지널 블랙 미러 시즌1: <당신의 모든 순간>에서 그리는 미래는 기발하다. 기억을 저장할 수 있고 언제든 재생할 수 있다. 시각화된 모든 경험은 저장된다. 안구가 아닌 목덜미의 칩을 살점을 헤집어 뽑아가지 않는 이상 엄지만 한 리모컨으로 과거 시점의 모든 순간을 재생할 수 있다. 안구는 카메라 촬영과 빔프로젝터 영사 기능을 동시에 할 수 있다. 인간사와 일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술이다. 연인과 결혼 생활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어떻긴, 헬게이트다.
남편 리암은 아내 피온의 외도를 의심한다. (흔하게도) 둘은 서로가 첫 번째 연인이 아니다. 서로의 과거 연애사를 오픈했지만 리암은 여전히 피온을 의심한다. 피온의 지인들과 저녁 모임 후 리암은 기억 저장 장치를 재생한다. 피온의 대화, 표정, 리액션 등 시각화된 모든 정보를 자의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며 외도를 의심한다. 추궁한다. 피온은 괴롭다. 아무리 애정 고백이 오가도 소용없다. 둘이 나눈 과거의 쾌락은 현재의 관계 유지에 힘이 없다. 리암은 만취 후 피온의 과거 연인을 찾아가 깨진 유리로 겁박하며 그의 기억에서 피온 출연 분량을 모조리 삭제한다. 그의 심판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아기의 친부인지 의심한다. 피온을 다시 추궁한다. 피온은 무너진다. 기억 재생 장치를 열면 끝장이다. 결혼 전의 -내밀한 경험이 담긴- 기억 영상까지 모조리 확인할 수 있으니까. 부정해도 소용없다. 진실도 소용없다. 재판정의 증거물처럼 진실이 재생되는 순간 신혼집은 파국을 맞는다. 이럴 거면 결혼하면서 애초 상대의 뇌를 자신의 뇌에 각각 복사&붙여 넣기 하지 그랬어. 리암의 삶은 현재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기억 재생 장치로 유지되고 있었다. 재생된 기억은 볼 때마다 다르게 해석되었다. 편향되고 왜곡되어 부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확신이 확인된다고 해서 지금의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 재앙의 쓰나미가 되었을 뿐. 리암은 계획이 없었고 욕망만 있었으며 모든 관계를 망치고 후회만 남았다. 살점을 뜯어 칩을 제거한 들 늦었다. 리암은 처절한 과정을 거쳐 피온이 없던 시절로 회귀한다. 피온은 끊임없이 경고했고, 이렇게 된 이상 리암을 떠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이의 남은 삶은 이제 누구의 영상에 저장되나. 결혼을 망친 건 기술이 아니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