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필립스, 선장은 먼저 탈출하지 않는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 캡틴 필립스

by 백승권




언제쯤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선장은 배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 있다. 모두가 안전할 때까지 (행여 배가 완전히 침몰하는 한이 있더라도) 선장은 결코 배를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쓰여 있었다. 거대한 바다 위에서 목적지를 향하는 배를 통제할 권한도 그 배에 탄 다수의 생명에 대한 책임도 선장에게 있다는 논지였다. 러셀 크로우의 '마스터 앤 커맨더'에서 그런 선장의 모습을 봤었다. 거센 풍랑에 휩쓸려 침몰 직전의 함선을 구하기 위해, 선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 소년의 희생을 결정했었던 장면. 그 결정 덕에 살아남은 이들은 양심의 가책까지 선장에게 부여했었다. '네가 결정했으니 당신이 그 애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이런 눈빛으로. 러셀 크로우는 긴 침묵으로 받아들이고 추모했었다.


캡틴 필립스의 '필립스' 역시 선장이다. 선장이라는 직업인, 원칙을 중요시하고 넓은 시야를 지니고 있으며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달하기 위한 엄격함을 추구한다. 위험이 수반되는 일. 거센 저항을 뚫고 해적이 그들의 배에 올라탄다. 어부였던 소말리아인들이었다. 자신들 해역의 수산자원을 강대국의 배들이 휩쓸어 가버리자 수입원을 잃고 해적으로 전락했다. 길고 깡마른 몸, 퀭하고 홀쭉한 얼굴, 누가 봐도 스물 중반이 안 되어 보이는 한국에 있었다면 '청춘'이라고 불렸을 이들. 말이 해적이지 바다 위에서 총 든 양아치였다. 해적질의 목적은 약탈이 아니었다. 3천 톤에 이르는 컨테이너를 옮겨 싣기엔 그들이 타고 온 모터보트는 고작 4인용이었다. 선원을 인질로 잡아 수백 수천만 달러의 돈을 받아 내는 게 목적이었다. 필립스(톰 행크스)가 과거 대테러부대 소속이거나 적국의 주요 인사를 암살하는 '본'과 같은 요원이었다면 바다 괴물이 나와서 해적들을 집어삼키었어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실화였다.


어린 해적들을 상대로 말로 구워삶던 필립스는 급기야 홀로 협상의 미끼가 될 인질을 자처하고 작은 구명선에 합류한다. 필립스 선장은 톰 행크스가 연기해서 그런지, 마치 타국으로 영어를 가르치러 온 지적이고 계산이 빠른 파견 교사 같은 이미지를 계속 보여준다. 해적들은 필립스의 말 한마디에 뒤집어지고 갈팡질팡하고 죽이지도 못하고 살리지도 못하며 내부 분열을 일으킨다.


좁고 더운 공간에서 표류에 가까운 항해를 이어가는 그들, 영화는 해양 블록버스터로 변한다. 미 해군이 신고를 접수하고, 네이비씰이 출동하며 무인기와 헬기가 뜨고, 전함 수척이 에워싼다. 미국인을 건들면 이렇게 된다라는 것을 강력히 경고한다. 협상가가 투입되고, 저격수가 배치되며 홀로 분투하던 필립스 선장은 급기야 바다에 뛰어들어 탈출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러다 실패해서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지고 재갈이 물린다. 영웅은 없었다. 총알에 머리가 터진 해적들의 피로 물든 캡틴 필립스의 겁에 질린 절규와 가족들을 향한 애원만이 아련하게 남았을 뿐. 해적들이 배를 점거하는 중반까지 긴장감을 보여주던 영화는 해군이 개입되면서 미 국방력 홍보 블록버스터로 바뀐다. 애초 국가 간의 '균형'이 존재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


선을 먼저 넘어온 것은 해적이 아닌, 강대국들이었다. 그들의 경제권 약탈이 소말리아 어부들을 거지로 만들었고 총을 들게 했으며 빼앗지 않으면 굶어 죽는 지경에 이르게 했다. 영화에서는 살짝 언급되지만, 해적질의 배경엔 악마가 아닌 빈곤과 착취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캐릭터 비중도 인질로서 제약이 많았던 선장 필립스와 무장한 해적들이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카메라는 유독 분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 그들의 눈빛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선장은 구출되고 해적들은 사살된다. 위험천만한 실화지만 끝이 좋아 가능했던 영화화였달까. 보면서 내내 우리나라 배가 저런 일을 당했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다.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되어 한국 외교부와 회사에 외면받아 오랫동안(582일) 풀려나지 못했던 '제미니호' 사건을 잊지 않고 있다.





연애의 허상 - 영화와 사랑에 대한 비밀과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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