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윤 감독. 또 하나의 약속
기업과 근로자의 대립구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주요 골격을 이루는 기업을 주로 나쁜 쪽으로 설정하고 비난한다. 그 상대편에 있는 근로자는 주로 생을 연명하려다가 인권을 박탈당하고 심신을 착취당하며 이미 소유한 자본과 시간마저 착취당하는 약자가 된다. 이런 대립구도는 선동의 목적으로 간편하게 활용되고 수많은 담론을 확산, 재생산한다. 절대악이 된 이상 기업은 애초부터 구석에 몰린다. 기다린다. 다른 이슈들로 자신들의 잘못이 희석될 때까지, 잊힐 때까지, 잠잠해질 때까지. 자유의지에 기반한 연대는 불안하다. 저항의 역사보다 길 수밖에 없는 기득권의 시스템은 견고하다. 웅성거림은 잦아들고, 악은 반복된다. 다시 비난에 부딪히지만 학습을 통해 늘 대처 방안을 새롭게 개선해왔던 기업은 작은 꼬리만 자르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자신들이 졌다는 사례를 남기지 않는다. 그렇게 빼앗는 자들은 늘 빼앗고, 빼앗긴 자들은 늘 빼앗긴다.
자본을 중시하는 태도가 대륙을 점거하는 속도만큼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에 관심을 가졌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힘없는 가정이다. 자본은 애초 자본을 가진 인간, 자본의 주인에게만 관심을 기울였을 뿐이다. 자본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자본을 위해 필요한 정치인을 내세우고, 자본을 위해 말을 듣지 않는 나라로 가는 비행기와 배를 끊어버렸다. 자본은 애초 목적이 복잡하지 않았고, 자본 자체가 철학과 목적이었으며 존재의 이유였다. 이따금 이러한 과정에 몸을 담았던 이들이 과거의 과오들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 또한 자본에 젖었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저런 참회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고, 자본을 원하지만 자본과 가깝지 않았던 이들은 해석하기도 했다. 자본은 겉모습에 있어 동시대에서 가장 화려한 모습을 지녔기에 절대다수의 동경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 내면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경험한 이들의 증언이 있었지만 케이블 프로그램의 중간 광고처럼 금세 사라지면 그만이었다.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탐하고 모두가 자본의 주인이 되길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다수의 욕망은 그 염원의 대상이 실물로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종교가 되어 군림한다. 포교는 쉬지 않고 이뤄지고, 자본의 테두리를 거부했다가 인생이 망가진 사례는 얼마든지 제시가 가능하다. 모든 죽음을 자본과 합의하지 못한 죄의 탓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자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고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이들이 증언하지만 이 또한 자본의 팔 안쪽에서 기능하며 더 많은 자본을 불러들이는데 쓰이기도 한다. 자본은 형체를 정의하기 어렵다. 악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악마의 채찍으로 보이고, 선이라고 여기는 순간 천사의 지팡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애초 증오의 대상을 자본이라 칭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 싸움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게 낫다. 어차피 싸움을 시작하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견제가 들어가고 회유가 시도되며 겁박이 닥쳐올 테지만, 자본이라고 부르는 대상에 피해를 입었다고 여겨지고, 그 피해에 대한 울분을 어떤 식으로든 (그 방식이 자본의 형태이더라도) 보상받고 싶다면 대상을 세분화시켜서 불러야 할 것이다. 가장 많은 피해가 보고되고 가장 많은 싸움이 일어났지만 가장 많은 망각 또한 이뤄지게 한 그곳, 그것.
'삼성'이라는 이름의 연쇄살인마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는 진성이라는 회사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과 영화 속 진성이 현실의 삼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 취업했던 사람들이 백혈병으로 죽어 나간다. 다시 말하면 근로자들이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다 죽는다. 노화가 아닌 이상, 사람이 죽는 데는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기업도 돈을 들여 인력으로 모아놓은 이상, 망하고 싶지 않다면 원인을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했을 것이다. 근로자들이 다 죽는다면 일할 사람이 없을 테니까. 일할 사람이 없으면 돈을 벌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삼성은 그러지 않는다. 아니 원인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대책을 잘못 마련한다. 죽음을 덮으려고 한 것이다. 자기 회사 직원이 아닌, 자신이 들어오고 싶다고 해서 들여보내 준 사업장에서 개인으로서 질병을 얻은 것뿐이라고 말한다. 자기 회사는 깨끗하다고 정평이 나있어서 일하는 사람들이 불만도 없고 그러니 당연히 오염물질을 들이마셔 백혈병을 비롯한 이름도 어려운 병들에 시달릴 일이 없다고 말한다. 준수한다면 신체적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기본적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았지만, 이러한 것들을 다 챙긴다면 생존할 수 없는 조건도 만들어두었기에 근로자들은 수량을 늘리기 위해 마스크를 벗고 독성물질을 들이마셔야 했었다. 이러한 배경을 다 알고 그러한 환경으로 몰아놓았으며 결국 수많은 이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했으면서도 삼성은 자신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 지가 병 걸리고 남 탓하냐고 일갈한다. 항암치료로 머리를 다 밀고 앙상한 몰골로 병상에 누워있던 환자와 그 보호자를 향해.
독일이 600만 유태인을 인종 청소하기 위해 만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용했던 물질도 삼성 공장에서 일했던 이들이 들이마신 독성물질 중 하나였다. 살인 가스실에서 마스크도 벗은 채 일한 꼴이었다. 영화가 평생 택시 운전을 하며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던 남자가 삼성에 취직했다는 딸이 시체로 돌아온 이야기로 보이지 않았다. 눈물을 유도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런 부성애를 그린 영화로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삼성이 직원을 어떻게 죽이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과정을 담은 상업적 영상기록물처럼 보였다. 자본이 인간을 어떻게 학살하는가에 대한 작은 사례집 같았다. 크게 보면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의미 있는 승리를 담은 법정극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패배하고 알려지지 않으며 소리 없이 죽어간, 죽음을 유도당한 이들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이기든 지든 죽은 자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가족과 친구를 잃은 남은 자들이 남은 생 동안 고통에 시달릴 뿐이다.
우린 자본 안에서 거하고, 자본 안에서 일하며, 자본 안에서 숨 쉬고, 자본 안에서 숨을 거둔다. 자본의 위로는 액수를 떠나 늘 늦을 수밖에 없고 자본이 대신할 수 있는 슬픔의 수량은 제로에 가깝다. 자본으로 모든 일이 가능했던 세상은 자본으로 상실한 누군가가 있는 세상과 전혀 다른 곳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본에게 뒤늦은(늦을 수밖에 없는) 항거를 하고, 시간을 들여 고단한 연대를 하지만 결코 그 끝의 긍정과 희망을 장담하지 못한다. 삼성의 끄나풀이 찾아와 수없이 봉투를 들이밀고 결국 너희도 돈 앞에서 어쩔 수 없는 그저 그런 무리들 아니냐라는 투로 유혹할 때마다 흔들리고, 또 이겨내기도 하지만 자신들은 알고 있다. 우린 대부분 삼성이 흔드는 두툼한 봉투 앞에서 지난 슬픔을 잊고 잠시나마 어떤 선택과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자본의 일부 개체일 뿐이라는 것을. 이를 위해 수많은 공을 들인 삼성 또한 이를 가장 잘 알고 있고. 삼성은 귀찮을 뿐이다. 자신들이 설정한 이러한 질서를 굳이 양심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깨려는 사람들이. 어차피 결국엔 삼성의 의도대로 모든 것이 크게 흔들리지 않고 돌아갈 테지만 그래도 굳이 이건 아니지 않냐며 진심 어린 사과와 진상을 낱낱이 밝히기를 원한다며 수작 부리려는 사람들이 불편할 뿐이다. 밥상 위에 앉아 소중한 식사 시간을 방해하는 파리처럼.
자본으로 잃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뒤늦은 애정표현을 위해, 투쟁 자체가 사죄 행위처럼 보이기도 했다. 삼성에 입사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딸보다 더 기쁜 아비였다. 그런 아비를 생각해서라도 회사에 다니기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마음 약한 딸의 도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입을 닫았고, 병원에 가야 했을 땐 이미 늦었다. 죄책감도 용서도 원망도 모두 부질없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난한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생존을 위한 정보가 부족하다. 정보의 부족은 곧 정보 공급의 차단으로 읽힐 수도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정보가 없었던 이들의 수많은 주변인들이 한 곳에서 죽었다. 정보를 모았을 땐 이미 늦었다. 할 수 있는 건 이제라도 죄 지은자에게 죄를 묻는 것이었다. 그것은 권리였다.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 딸을 죽인 건 아비가 아니었다. 딸이 다니던 회사의 독성물질이었고, 이를 알면서도 방치하고 재촉한 기업, 삼성이라는 이름의 자본 탓이었다. 아비가 남은 평생을 딸의 살인자로 감당하기엔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싸워야 했다. 증명해야 했다. 딸을 죽인 건 내가 아니라고, 마음이 그랬을지언정 우리 딸을 죽은 살인자들은 너희라고, 삼성 너희라고 말해야 했다. 한 지역에서 택시만 몰던 남자를 자본이 투사로 만들었다. 도저히 질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개개인의 평화는 잠시나마 착각처럼 스며들 수 있을지언정, 세상의 균형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자본은 불균형을 통해서 차익을 얻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생명들의 불씨를 꺼뜨리고 있다. 삼성은 한국에서 노동자들의 가장 많은 사망 소식을 전한 대표기업 중 하나고 제대로 보상하지 않고 덮으려는 수많은 불법적 행위들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삼성에 다니는 많은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자신을 애국자로 여길지도 모른다. 내가 삼성에 다니고 삼성이 있기에 한국의 경제가 이 정도 유지될 수 있는 거라고, 삼성이 없다면 한국은 망한다고. 이건 마치 죄 없는 대학생을 빨갱이로 몰고 변호사를 짓밟으며 나 같은 사람 덕에 니들이 숨을 쉰다고 말하는 어느 고위 공무원과 다를 게 없는 착각이다. 애국이라는 망상이 불러오는 파국의 상황처럼, 자본이라는 종교 휘하에서 일어나는 비극도 더하면 더했지 만만치 않다. 우리 중 다수는 끝내 자본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 안에서 숨을 거둘 것이다. 자본의 살육도 자본을 향한 저항도 쉬 멈추지 않을 것이다. 중간은 없다. 누군가가 멈추게 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살인에 동참하는 이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자본 안에서 당신이 선택해야 할 문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