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지, 금기를 목격한 죄

루이 말 감독. 데미지

by 백승권

이건 마치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사랑이야기.


그녀(줄리엣 비노쉬)가 나타나고 남자(제레미 아이언스)는 무너졌다. 그들이 아들의 여자 친구와 남자 친구의 아버지로 만나지 않았어도 이토록 강렬하게 서로를 끌어당길 수 있었을까? 부와 명예, 사회적 지위와 행복한 가정이라는 완벽한 배경이 없었다면 (이 모든 걸 모조리 버리고) 한 여자에게 투신하고 싶은 악마적인 충동에 사로잡혔을까? 오빠를 닮은 남자를 선택해서 과거 오빠의 죽음을 속죄하려는 여자가 오빠를 닮은 남자의 아버지에게 빠져드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들을 둘러싼 금기는 그들이 사랑이라 부르는 모든 파멸의 이유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이 저지른 선택은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더 쾌락적이고 유혹적일 수 있었다.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과정을 통해 한 여자에게서 자신의 새로운 욕망을 발견한 남자와 타인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과정을 통해 한 남자에게 현세의 새로운 지옥을 선물한 여자는 자신들의 섹스가 서로를 상처 입히는 것을 넘어 아들이자 약혼자의 두개골을 파괴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살 길을 찾아가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다만 그 살 길이 남자에겐 여자였고 여자에겐 다른 남자였을 뿐.


여자는 애초 경고했었다.


나는 상처 받은 사람이고 상처 받는 이들은 어떤 경우에서도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여자의 땀과 체온을 탐닉하기 바빴던 남자는 듣지 않았다. 자신이 설정한 러브스토리에 흠뻑 젖어 국경을 넘어 여자의 행방을 찾아 헤맸고 바지를 끌러 내리고 여자의 몸속에 다급히 자신을 넣는 행위에서 모든 평화를 찾았으며 감격에 겨워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는 마치 처음 사랑에 빠진 남자처럼 굴었다. 조급해하고 어떻게 해서든 옆에 두려고 안달하며 소유하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선을 눈치챈 주변인들에게 발각되었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잠시 눈을 뜨고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시도를 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여자의 말 한마디로 남자는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침대를 태우고 공기를 태우고 공간을 태워버렸다. 그렇게 한 침대에서 두 개의 육체가 불타고 있을 때, 문이 열린다.


역할이 충돌하며 펑펑 터지는 불꽃놀이 같은 광경. 모든 금기와 속박을 벗은 남녀가 하나로 엉켜있었고 아버지와 약혼녀가 하나로 엉켜 있었다. 아들이자 연인의 눈앞에서. 남자가 부끄러움을 알았다면 창문 밖으로 뛰어들었을 테지만, 그는 몰랐다. 여자가 죄책감을 느꼈다면 울부짖으며 용서를 구했겠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문을 연 목격자는 사라졌다. 사랑을 방해한 죄로 금기를 목격한 죄의 형벌로 현장에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금기를 무시했던 가해자들은 어떤 데미지도 입지 않은 채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모든 것이 소멸된 후에도 시간을 추억하고 관계를 그리워하며.


모든 장면이 유리 같았다. 당장이라도 깨어질 것 같았고 모두의 눈앞에서 공개 재판을 당할 것만 같았다. 정제된 의상, 카메라의 흐름, 작은 움직임과 표정 하나하나까지 두 남녀 사이의 중력에 사로잡혀 완전히 통제되고 있었다. 중고등학생 때 봤다면 인상 깊었던 야한 영화 정도였겠지만 이제야 보게 된 루이 말 감독의 데미지는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처참하고 기이한 한 편의 소동극이었다.


쌓아둔 모든 것을 충동적 사랑에 베팅했던 플레밍(제레미 아이언스)에 비해 그의 목적이 된 여자 바튼(줄리엣 비노쉬)은 애초 잃을 게 없었다. 마치 그녀는 처음부터 그와 그의 아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화목한 가정, 그녀가 가지지 못했던 세계를 부숴버리려고 다가온 악녀에 가까웠다. 그리고 악녀의 효과적인 접근법은 무엇보다도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를 통한 차가운 정서의 희생자 캐릭터로의 분장. 그것이 그녀의 실제 역사 더라도 사내를 뒤흔들기 위한 위장으로서 충분히 기능했다.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도 가지기 힘든 타인들의 세계를 부숴버리는 데 성공했다. 가장 적은 투자를 통한 쾌거. 영화의 마지막,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남자는 어디선가 여자를 본 것처럼 회상한다. 그럴 리 없을 것이다. 여자는 계속 자신과 다른 세계를 파괴하며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는 사내들의 몸을 불태우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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