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 다이어리: 사진이 죽음을 기억할 때

by 백승권



*이상 모두 뉴욕타임스 사진들




뉴욕타임스엔 전쟁과 전염병으로 죽은 자들의 사진이 매일 실린다. 사고 현장, 시체, 유족, 매장, 무덤, 피와 표정들. 죽음은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새로운 소재고 끊임없이 일어나며 뉴욕타임스는 그중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사진을 헤드라인과 기사와 함께 싣는다. 다친 군인, 우는 아이, 비통한 표정의 사람들과 시체를 옮기고 묻는 의료진들, 관 또는 커다란 비닐, 새까맣게 폭파된 차량들. 나는 옆에서 포켓몬 VOD를 보는 도로시가 혹시나 신문의 사진을 보고 놀랄까 봐 손으로 가리며 조심히 넘긴다. 종이에 프린트된 보도사진은 인스타그램 피드의 보도사진과 같을 수 없다. 그 소재가 죽음일 때는 (이젠 콘텐츠라고 불리는) 사진들의 노출되는 격차가 너무 크다. 뉴욕타임스라는 브랜드의 (인쇄 버전의) 지면에 실린 사진과 이미지들은 수위와 논조를 조율해 선을 유지하지만 개인의 인스타그램 피드에 진열되는 사진들은 아니다. 뉴욕타임스 지면의 사진들 역시 음식과 문화, 오페라와 영화, 인종 갈등과 정치, 전쟁과 경제 등 각 카테고리마다 성격과 결이 천차만별이지만 다양한 독자의 평균적인 수용성을 고려한 듯한 인상을 준다. 이 포스팅에 업로드된 이미지처럼 전쟁과 질병의 참혹함이 표현되는 사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급작스러운 충격에 휩싸이지 않고 기획된 내용을 상징하는 수준에 맞춰진다. 하지만 개인의 인스타그램 피드가 그러한가. 팔로잉하는 채널이 뒤섞이면 휴대폰 화면에서 안구로까지 분출되는 이미지들은 심해와 용광로를 번갈아 드나든다. 우크라이나의 폭파된 도시와 뒹구는 시체들 보도사진 밑으로 콜 오브 듀티 신작의 게임 화면이 플레이되고 그 아래로 세이브 더 칠드런 광고가 뜨고 그 아래로 오열하는 유족 사진과 무덤들, 그 아래로 펜데믹 시체를 옮기는 사진, 그 아래로 디스패치 연예인 뉴스와 그 아래로 다이어트 광고가 뜨는 식이다. 죽음이란 소재는 다루는 자의 태도에 따라 목적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뤄진다. 객관성에 대한 정의는 너무 폭넓다. 수용자의 입장에 따라 너무 다르게 받아들여지니까. 안타까운 심정은 미사일을 방향을 바꿀 수 없다. 오히려 배틀그라운드 동시 접속자 수를 늘려줄지도 모른다. 사진은 죽음을 기록하지만 목적과 반응은 제대로 만나지 못한다. 이름 없이 죽어가는 약자들이 줄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참 편히도 구경꾼의 지위를 누리는구나 싶다. (위의 사진들처럼) 저렇게 가까이 다가갔어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죽음들이 너무 많을 것이다. 더 많은 죽음들이 기억되어야 한다. 사진, 글, 그림, 그 어떤 표현방식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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