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이 자욱해질 때가 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뭘까. 어떤 강력한 모터를 달아야 흡입기가 연기를 모조리 빨아들일까. 오랫동안 켜켜이 채워진 것들을 영문도 모르고 왜 비워내야 할까. 그걸 설득하고 받아들이고 결국 이행해야 하는 과정은 얼마나 비참할까. 원인도 과정도 결과도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어떻게 숨을 쉬고 팔다리를 움직이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실체와 마주하는 건 얼마나 버거울까. 굳이 어떻게든 이해를 하기 위해 그렇게 다음 과정으로 생각을 진전시키기 위해 잘잘못을 따져야 하는 일은 얼마나 신경을 곤두서게 할까. 이런 일도 생길 수 있다지만 이런 일에 대응하는 방식이 내 선택이라면 그 피해규모는 어떻게 정해야 할까. 자폭? 테러? 유무형의 공간을 폭파시킨다면 나도 그 안에 있을 텐데. 흩어진 잔해와 경험과 기억을 수습할 수 있을까. 최소한의 자기 방어를 위해 누군가를 공격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공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누군가를 공격하는 사람이 되어서 무엇보다 내가 스스로에게 그렇게 인식되어서 앞으로의 삶에 유리한 게 무엇일까. 그건 지울 수 없는 손실이자 영원한 결핍인데. 관계의 일부로 살아가야 한다면 도미노의 이름 모를 어느 중간에 서야 한다면 이미지는 그릴 수 있겠지만 이게 실질적인 피해의 영역으로 들어온다면, 넘어지는 게 맞을까. 영문도 모르고 닥쳐온 광풍에 넘어져야 할까. 이건 도미노인데. 내가 넘어지면 내 뒤의 핀들도 모조리 와르르인데. 그 광경을 핏물을 잿더미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이게 아니라면 견디는 게 가능할까. 견디다가 파괴되면 마찬가지 결과일 텐데. 견디다가 어쩌다 살아남아도 회복불가의 장애를 안고 점액질처럼 뇌를 지우고 뼈를 비우고 눈을 뽑고 혀를 자른 채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며 반복할 텐데. 그럴 수 있을까. 원인과 문제로 구분할 수 있다면 그래서 원인을 제거하든 문제로 인식하지 않든 간단하게 보드판의 마커를 지우듯 대할 수 있다면 여기까지 도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원인이 문제이고 문제가 원인인 유기적인 상황에서 시계를 되돌려 인물과 결정을 삭제하든 평행우주로 이민을 가든 해야 겨우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까지 과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나라고 누가 묻지도 않겠지만 스스로 물었던 과거에게 답을 해야 한다면 다시 폐허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다. 이건 그저 상상과 허구의 폐허일 수 없다. 이전에 유사 경험을 겪은 자에게 폐허는 전신화상과도 같다. 머리가 터지거나 신체 일부가 심하게 데거나 뼈가 부서지거나 내장이 뚫릴 뻔한 가시적 물리적 경험이 다시 정신을 덮치고 다시 외면까지 전염시킨다면 남은 신경과 근육과 보호본능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속도의 차이일 뿐. 다시 훼손된 생의 일부에 묶여 사는 것 밖에. 이건 견딤의 영역이 아니다. 거대하게 파헤친 구덩이 앞에서 눈을 감고 이마에 총을 겨누는 일, 비무장으로 벽에 세워두고 눈을 가린 채 총을 난사하는 일, 사슬로 온몸을 묶고 눈을 가리고 산 채로 바다에 던지는 일... 같은 영역이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하나. 이런 선택지 안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라는 옵션이 성립하나. 그걸 고른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나. 이런 글은 아무리 길어도 실체와 해결에 가닿을 수 없다. 엑스레이, 단층촬영, MRI 같은 것. 겉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한다고 해도 진행과 현상의 확인일뿐, 치료와 해결 자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의 마지막 문장에는 마침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