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카피를 쓰고 싶다

기꺼이 다른 길을 가겠다

by 백승권

어느 날, 내 손을 거친 카피를 훑어보았을 때,
나의 생각은 없었고, 나의 단어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난 소설가가 아니고, 난 시인이 아니라서
나의 생각이 모두를 감동시킬 수 없었다 할지라도

나의 것이 없는 그 한 줄에서
난 그저 들은 것을 옮겨놓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카피들을 설명할 수 없다.
나는 그 카피들 앞에서 떳떳할 수 없다.

늘 나의 부족한 이해 탓으로 돌리려 해도
누적되는 아쉬움은 업에 대한 회의를 남게 한다.

모두가 겪는 고민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빠지는 슬럼프라 할지라도

내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펜 끝을 점점 더 망설이게 만든다.

내가 나를 더 이상 설득할 수 없는 그날,
내가 여전히 카피를 쓰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따위는 하지 않는다.

난 여전히 펜을 잡고 있겠지만
난 여전히 광고를 좋아하겠지만

그것만으로 카피라이터로 불리기엔
난 현실이라 뭉뚱그려진 상황들에 너무 지쳤으니까.

나의 온전함이 조사와 쉼표뿐인 지금,
이것이 모든 카피라이터가 겪는 숙명이라면
기꺼이 다른 길을 가겠다.

더 이상 즐길 수 없는 일이라면,
더 이상 납득할 수 없는 결과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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