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6.15~2009.4.9
이 방 처음 들어올 적 내 신분은 인턴이었다. 석 달 후 백수였고, 두 달 후 다시 인턴이었다. 다시 석 달 후 이직을 했고, 이후 스물다섯 달이 지났다. 이 글은 그 사이에 있었던 첫 경험에 대한 자잘한 기억들이다.
여기 사는 동안 첫 월급이란 걸 받았다.
여기 사는 동안 첫 직장에 들어갔으니까.
여기 사는 동안 일상 언어에 ‘새벽 퇴근’을 추가했고,
여기 사는 동안 ‘주말출근’에 길들여졌다.
여기 사는 동안 모르는 여자들이 탬버린을 흔드는 노래방에 끌려갔고,
여기 사는 동안 잊을 수 없는 굴욕과 능멸과 멸시를 체험했다.
여기 사는 동안 포기와 타협이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알았고,
여기 사는 동안 지리멸렬한 군상들 사이에서 생의 불공평을 깨달았다.
여기 사는 동안 돈의 영향력을 알았다.
여기 사는 동안 계약관계의 냉정함도 배웠다.
여기 사는 동안 약자의 한계를 인정했고,
여기 사는 동안 강자의 비논리적인 면모도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
여기 사는 동안 세상을 향한 시선을 다듬고,
여기 사는 동안 허상에 얽매지 않기 위한 노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여기 사는 동안 MS-WORD와 친해졌다.
여기 사는 동안 블로그도 시작했다.
여기 사는 동안 카피란 걸 쓰기 시작했고,
여기 사는 동안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여기 사는 동안 AE(광고기획자)와 커뮤니케이션을 했고, 디자이너들과 브레인스토밍도 했다.
여기 사는 동안 MSN 메신저를 설치해보고,
여기 사는 동안 문자메시지로 상사의 OK도 받아봤다.
여기 사는 동안 일하며 즐거웠고,
여기 사는 동안 놀아도 불안했다.
여기 사는 동안 지큐를 탐하기 시작했다,
여기 사는 동안 보그에 반하기 시작했다.
여기 사는 동안 15년 사랑하던 젤을 왁스로 바꿨고,
여기 사는 동안 슈트와 넥타이를 고르기 시작했다.
여기 사는 동안 파란색 팬츠와 보라색 팬츠를 샀고,
여기 사는 동안 카이아크만, 엘록, 자라를 샀다.
여기 사는 동안 아이팟을 사고
여기 사는 동안 시디플레이어도 샀다.
여기 사는 동안 넬, 에픽하이, 김동률, 이소라, 토이의 앨범들을 모았다.
여기 사는 동안 원스, 여름날, 헤드윅, 다크 나이트 OST에 귀가 호강했다.
여기 있을 때 허영만, 다케히코 이노우에, 천계영의 만화에 꽂혔고,
여기 있을 때 공지영의 에세이, 김훈의 소설, 수전 손택의 평론집에 열광했다.
아쉽게 다 적지 못한다.
여기 사는 동안 처음 만난 사람들,
여기 사는 동안 처음 겪은 일들,
여기 사는 동안 처음 느낀 감정들,
여기 사는 동안 처음 산 물건들,
여기 사는 동안 처음 먹어본 음식들,
여기 사는 동안 처음 가본 장소들,
여기 사는 동안 처음 들어본 말들,
여기 사는 동안 처음 써본 글들,
여기 사는 동안 처음 들어본 음악들,
여기 사는 동안 처음 본 그림들,
여기 사는 동안 처음 본 사진들,
여기 사는 동안 처음 본 영화들,
여기 사는 동안 처음 읽은 책들, 처음, 처음, 처음이 많아서 여기를 오래 기억나게 할 것 같은, 어둡고 예쁘고 차갑고 뜨거웠던 순간들.
백치 같은 표정을 자주 짓곤 하는 난치 수준의 기억력인데도 저 많은 ‘처음’들이 따다다 떠오르더라. 사이사이 시간을 딛고 애써 한 사내를 기워온 조각이기에, 앞으로의 바람도 고난도 견디게 해줄 것이다. 의심과 의혹으로 물든 사고 안에서 가까스로 지켜지고 있는 순박한 초심의 흔적들과, 매일 밤 잠들기 전 피어오르다 죽어간 문장들과, 전혀 고급스럽지 못한 표현들의 빈곤한 총합과도 이젠 안녕. 695-33번지, 여기 사는 동안 참 행복했다.
2006.6.15~2009.4.9
-이사 전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