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by 백승권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옳았다. 난 그리고 때때로 그것을 부정하는 데 적잖은 에너지를 쏟았다. 하지만 결국 얻어지는 결론이란 것은 내가 틀렸고, 네가 옳았다는 허탈함이었다. 싸우지 않는다. 가끔 의견을 조율하는 시간을 가질 뿐. 정말 놀라울 정도로 나에 대해서 누구보다 더 –또 나보다 더- 날 더 잘 알고 있는 이 아이는 바라볼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같이 지낼수록, 신기한 구석뿐이다. 새벽마다 빌고 또 비는 할머니의 청(?)을 들어주신 하나님이 어찌나 예쁘게 봐주셨는지, 산채로 천국을 경험하고 있다. 일상은 기적, 시간을 멈춰달란 바람은 갖지 않으리.

종종 토크쇼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를 이야기하며 ‘완벽’이란 표현을 쓴다. 이젠 알 수 있다. 대본이 있건 없건, 과장이 아님을. 내게 없던 우리가 원하는, 내게 없던 우리에게 필요한, 내게 없던 우리에게 중요한 모든 삶의 대처방식들을 이 아이는 다 알고 있었다. 내가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는 동안, 이 아이는 기꺼이 부딪쳐가며 지식과 경험을 통해 지혜의 경지에 다다랐다. 감정의 동화를 넘어선 이성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세상의 석∙박사가 부럽지 않았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이 아이는 당당히 얻어냈다.

이러한 거침없음이 당당한 목소리와 표정, 태도로 나타났다. 사랑하는 이로서의 애정을 넘어선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경외감까지 들었다. 입을 약간 벌린 채 커진 동공으로 응시하는 일이 잦아졌다. 내가 ‘사랑’이란 단어를 남발하는 동안, 이 아이는 이행을 통해 찬란하게 드러냈다. 여자가 아깝다 라는 주변의 말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평생을 듣더라도 가장 기분 좋을 칭찬. 난 요술램프가 없단 이유로 바람을 들어주는 데 인색한데, 이 아인 생의 모든 단계의 대처방식이 프로그래밍된 듯, 과감하고 정확하며 주도면밀하고도 아름답게 돌파해갔다.

모두의 틈 속에서 어떤 성과를 이뤄내어야 하는 걸 경쟁이란 차가운 말로 불러야 한다면, 이 아인 아무도 다치지 않은 황홀한 승리를 연이어 이끌어 냈다. 난 같은 팀이란 이유만으로 영광의 월계관을 감사히 눌러쓸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을 가까이에서 보고 도와가며 한 인간에 대한 존경을 느끼고 있다. 1년 더 살았다고 오빠라 불리기엔 남은 인생 다 합쳐도 이 아이의 이런 놀라운 면을 흉내조차 낼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남은 시간 동안 덜 다치고 더 웃게 만드는 것. 더 좋은 생각들의 공유를 통해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는 것. 이를 위해 생업을 잇고, 더 사랑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것. 눈에 보이지 않아 또는 너무 흔해져 이 값없어 보이는 일들에 호흡을 불어넣고 감동으로 귀결시키는 것. 좀 더 현명해지고, 좀 더 귀 기울이는 것. 좀 더 부지런해지고, 좀 더 사려 깊어지는 것, 남자의 사전적 정의가 무엇이든 모두의 평가가 아닌 이 아이를 위해 성의와 헌신을 발휘하는 것. 이로서 그녀가 개인의 몸으로 태어나 개인의 자아로 걸어왔을지 언정, 그 마지막마저 외로움의 여운을 남기지 않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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