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죽음
그 해 겨울엔 훈련소에 있었다. 대선이 있었고 후보 홍보지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정치와 뉴스는 관심분야가 아니었지만. 생애 첫 번째 투표는 포기하기 아까운 권리였다. 선택에 따른 책임이 따라야 한다 믿었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아는 만큼 선택했다. 그가 당선되었던 날, 주름 가득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찍은 사람이 당선되었다 해서 정치에 대한 없던 관심이 순식간에 늘어날 일은 없었다. 뉴스의 상당 부분을 정치가 차지한다는 점을 새삼 실감했을 뿐. 그리고 적이 없을 거라 여겼던 그를 향한 불만의 목소리가 공공연히 들렸다는 것. 그때마다 어쩔 줄 몰라했다. 쉽게 뜻을 바꾸지 않을 것 같은 순박한 외모와 정감 있는 말투엔 호감 있었지만 지역감정이나 정치적 색깔 다툼에 대해선 무지했다. 그래서인지 이런 속사정을 들킬까 봐 그에 대한 아쉬운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비겁함, 난 딱 그 정도의 소인이었다.
한해 한해 크고 작은 이슈들을 지나며 이전과는 다른 긍정이 생겨났다. 그때까지 알고 있던 정치란 백화점을 붕괴시키고, 멀쩡한 다리를 무너뜨리며, 죄 없는 시민을 탱크로 깔아뭉개는 과정을 통해 힘없는 다수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힘의 다른 이름이었다. 수천억 원의 비리를 저지르고도 떳떳하게 잘 사는 것이고, 소수집단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그곳이 법을 제정하는 곳이든, 국민들의 대표가 모인 곳이든 헐뜯고 싸우고 욕함에 있어 주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슬슬 신뢰라는 게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건 마치 바위에 패인 빗물 자국 같아서, 생겨난 이상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 혼자만의 성과는 아니었겠지. 하지만 적어도 그와 우리가 원하던 세상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변화였다.
여러 글들과 의견들을 접하며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무관심의 영역으로 치부하기에 정치는, 과정을 지켜보는 데 있어 불편할지언정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회의 거대한 중추였다. 대한민국 정치의 중앙에 그가 있었고, 악전고투 속에서 의지를 관철하려 애쓰는 모습이 종종 눈에 들어왔다. 가난, 고졸 출신, 인권변호사. 쉽지 않은 길을 기어이 지나온 인물이었다. 간혹 그의 결정이 미더울 때도 있었지만. 때론 시류에 쓸려 답답함을 성토한 적도 있지만. 그는 그래도 ‘언젠가는…’이라는 긍정적인 기대감을 갖게 하는 몇 안 되는 정치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시대가 얼마 남지 않았던 2008 대선 무렵, 난 더 이상의 투표는 무의미하다고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시국은 어지러웠고, 앞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컸던 건 이제껏 겨우겨우 쌓아 올린 소중한 믿음들이 단번에 불도저로 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이뤄진 소기의 성과들이 이어지긴커녕, 존명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제발 하는 마음으로 다시 투표장을 찾았고, 선거 결과는 참담했다.
어느덧 사회인이 되어버린 나이, 선거 결과에 따라 정치를 다시 무관심의 대상으로 두기엔 이미 의식의 변화가 이뤄진 후였다. 자란 건 비판적 시각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한 5년간 난 어느새 은근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동시대를 사는 어떤 정치인과 지도자가 이런 믿음을 심어줄 수 있었을까? 함께 성장할 수 있었기에 난 어쩌면 행운아였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과거형으로 말할 수밖에 없단 사실이 너무 침통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없다.
이른 아침 비보를 듣는 순간, ‘민주주의의 죽음’이라는 일곱 글자가 뇌리에 박혔다. 그는 내게 정치인이라는 개인을 넘어선 어떤 상징과도 같았으니까. 그가 보여준 태도와 의지를 통해 정치에 대한 사고와 의식, -다수에 무조건 동조하지 않는- 비판적인 마인드를 키울 수 있었으니까. 그런 그가, 그토록 변화시키려 했던 세상에 의해 명을 달리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당혹감에 우울이 빈번히 찾아들었다. 정권의 시녀들과 뻐꾸기에 시달렸던 세월과 끔찍했던 최근의 시간들, 정의에 눈먼 세상을 향한 마지막 저항의 메시지로 읽히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표현을 빌려도 그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심연을 더욱 미어지게 한다. 그는 당대의 직함을 벗었을지 언정 여전한 희망의 증거였는데. 대한민국 정치는, 또 나는 앞으로 누구의 투지에게서 배워나갈 수 있을까? 너무 일찍 져버린 위인, 그로부터 얻은 것들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늘로 보낸다. 고마웠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