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자살, 또는 안락한 여행

고성수 소설. 안락한 여행

by 백승권

딸깍. 손가락 끝으로 지그시 눌러 현재의 삶을 끝내는 스위치가 가까이 있다면 인간의 죽음은 더 이상 뉴스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이 여전히 인간들 모여 사는 곳의 주요 뉴스인 이유 중 하나는 스스로 실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쉽고 흔하다면 그만큼 관심에서 멀어진다. 공기, 햇볕, 또는 빗물처럼 보이지 않아서 느껴지지 않거나 너무 당연해서 귀찮거나 되도록 피하고 싶거나 간단히 가릴 수 있으니까. 죽음은 비일비재하지만 여전히 내 일 같지 않으며 아주 느리게 진행되고 있지만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생존에 대한 사회화되고 학습된 애착. 사람들은 탄생 이후의 모든 것을 모조리 감각하고 경험하고 반응하고 있어서 뭔가 알고 있는 것 같고 그에 대한 감상을 기록으로 남기고 이야기를 퍼뜨리고 공유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과신한다. 보이는 삶을 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에게 지위를 부여한다. 나는 삶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어. 죽음은 어떤가. 죽음에 대한 태도는 결코 삶과 같지 않다. 삶과 죽음을 공존의 영역으로 묶으려는 시도는 아주 오래전부터 아주 다양하고 여러 차례 있어 왔지만 여전히 인류는 삶과 죽음을 동일한 비율로 섞어 믹서기에 돌리지 못한다. 잘 갈아서 한 컵으로 내놓지 못한다. 무지가 이렇게 무섭다. 죽음은 무지이자 두려움이며 누구도 자신 있게 떠들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죽음의 전문가는 없다. 장례지도사, 목사, 스님 등등이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제약회사 영업사원이나 사이비 교주가 더 죽음에 대한 마케팅에 능숙해 보인다. 삶이 문명의 외양적 혁신을 거듭하며 화려하게 진화하는 동안 죽음은 여전히 고대 이집트 무덤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죽음에 대한 관심과 태도는 인권 수준이 상향 평준화 되면서 점진적으로 운명이 아닌 개인의 결정권에 너그러워졌다. 오랫동안 나아지지 않는 병에 시달리는 가족을 두거나 자신에 대한 생명 연장 조치를 멈출 수 있도록 하는 요청하는 것이 그중 하나이다. 안락사는 그중에서도 가장 극단적 위치에 놓여 있다. 신체에 물리적 위해를 가하는 방식으로 스스로 생명을 끊던 (기존의 끔찍한) 방식에서 인간적 존엄을 잃지 않고 자신의 죽음을 선택, 결정, 실행하고 있다. 자살에 새로운 이름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자살의 브랜드화라고 할까. 회사, 담당 인원, 체계적 절차, 장비 등이 모두 어우러져 브랜드로 세워지고 광고와 마케팅을 하며 고객을 모으고 거래를 한다. 이제 자살을 고이 접어 상자에 담아 로고와 디자인이 가미된 포장지로 감쌀 수 있다. 이것이 나의 죽음이라고 당당히 알릴 수 있다. 살아있을 때 장례식을 치르며 부의금을 모아 좀 놀다가 화끈하게 이승 뜨자가 아니다. 안락사 탄생의 초기 의도는 물론 죽음보다 극심한 고통의 경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여름에게 안락사는 마지막 여행이었다. 지나치게 큰 비용이 들고 돌아오는 비행기는 없을 거라는 점이 상식적인 여행과 다른 점이었다. 한여름은 자신의 안락사를 결심한다. 결심하고 주변에 알리고 비용을 준비하며 현생을 정리한다. 이 모든 과정을 영상 기록으로 남길 프로듀서까지 동행하기로 한다. 할머니와 영정사진을 찍고 유품을 당근 거래하고 공항에서 추격전을 벌이고 돈가방을 날치기당하기도 한다. 살아가는 과정이 그렇듯 안락하게 죽으러 가는 길도 그리 안락하지는 않다. 리암 니슨의 명대사가 나오면서 주인공이 애써 유지하던 감정을 흐트러 뜨리기도 한다. 원래 가장 심각할 때가 가장 웃긴 일이 터질 때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한여름은 두 번 다시 다음 여름과 마주하지 않기로 한다. 누구도 어떤 상황도 한여름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 한여름의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남은 건 기계가 있다면 고장 나길 바라거나 주사기를 사용한다면 다른 약이 들어갔길 바랄 수밖에 없을 뿐이다. 이런 바람은 타인의 영역이다. 내가 아는 죽음이, 내가 막을 수 없는 죽음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 한여름은 한여름의 탄생을 선택하지는 못했지만 한여름의 죽음은 선택한다. 파도가 느려도 확실하게 밀려와 모래를 쓸어가듯 한여름은 죽음을 향해 그렇게 나아간다. 당사자의 의지와 기상이 저렇게 높고 뚜렷한데 비해 한 명의 방관자이자 독자로서 소용없는 가정을 해보자면, 내가 한여름의 가까운 지인이거나 행동반경에 있는 측근, 혈연관계라면 결코 한여름을 비행기에 태우지 않았을 것이다. 공항 관계자를 모조리 없애거나 당일 국제선 비행기를 폭파시키거나 한여름을 납치해서 안전가옥에 가두거나 안락사 진행 과정에 연계된 모든 자들을 죽여서라도 한여름이 혼자 비행기 타려는 시도를 분쇄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여름의 몸과 마음이 조금 다치는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심지어 내가 죽거나 다친다면 그럴 수도 있다. 한여름이 직선으로 펼쳐진 런웨이를 걷는 안락사로 나아가지 않으면 된다. 한여름을 모르는 모든 인류의 안락하지 못한 죽음을 각오하더라도 한여름의 안락한 죽음을 막을 것이다. 하지만 고성수 소설 속의 한여름은 이런 내 공상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여행을 떠난다. 공상을 하나 더 붙이자면 한여름의 이런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던 피디가 방송 온에어 당일 죄책감에 못 이겨 죽는 것이다. 한여름의 죽음을 막지 못한 자들은 한여름의 자살 의지를 막지 못하고 끝내 죽음으로 떠밀었다는 죄책감 안에서 남은 생 내내 활활 타오를 것이다. 그렇게 식지 않을 한여름의 화기를 감당하며 죽음도 삶도 아닌 여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