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나고

나의 역할

by 백승권

지친 몸을 씻는다.

거품을 내고 문지른다.

정수리부터 발가락까지 흠뻑 적신다.

열다섯 시간 정도 바깥에 있었다.

그중 다섯 시간은 차에 있었고

네 시간은 뭘 먹고 있었으며

나머지 다섯 시간은,

세세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깨어있었다.

허투루 쓴 시간이 거의 없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었고

정해진 목적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무엇을 먹거나 마시고

듣고 반응하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중엔 태어나

생전 처음 듣거나 보거나

겪은 일도 있었다.

조금 찜찜한 기분도 있었고

신기하기까지 대화도 있었으며

말리고 싶은 행동도 있었고

잘해주고 싶은 인물도 있었다.

돌아와 문을 열고 샤워기에 물을 틀며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

연극

의도한 언행은 많았지만

의도 속엔 진심의 전달도 있었고

상대를 향한 걱정과 배려도 있었으며

그냥 나의 역할이라는 책임감도 있었다.

모든 것에 대한 의미부여는

하잘 것 없는 짓이겠지만

뭔가 어색하고 가식적인 평가를

그칠 수 없다.

내가 오늘 그랬다.

하루 종일

원하는 말은 했지만

찬성하는 말은 아니었고

귀 기울여 들었지만

때로는 다른 곳을 쳐다보기도 했었다.

대화는

빨랐고

많았고

겹쳤고

즐겁기도 했다.

시간의 길이와 관계의 친밀도가 정비례했다면

단계별 가이드가 분명 보편화되었겠지.

한계를 직시하고,

제자리로 돌아와 본다.

비누거품을 씻어내고

물기를 제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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