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번역

by 백승권

감정 번역에는 너무 많은 종이가 필요해요

지정된 서체가 없어 손글씨로 쓰거든요

종이 아끼려고 양면에 꽉꽉 채우는데

너무 온몸을 웅크려 손끝에 힘을 모아 써서

손가락이 푸욱 눌리고 종이가 자주 찢어져요

마음도 찢어지고 하도 울며 문질러서

연고 발라도 눈가도 찢어지고 그래요


어떤 출력물은 읽기 힘들 수 있어요

투명 잉크로 쓰여서 불을 비춰야 보이기도 하고

어디서 흘렀는지 혈액이 번져서 내용이 안 보이고

번역 자체가 너무 엉성해서 문맥이 안 맞기도 해요

완결된 감정도 아닌데 너무 이른 해석처럼 여겨지고


인쇄된 종이의 온기가 식기 전에

고이 접어 봉투에 담아요

주소를 비워둬요 아직 몰라서

비둘기를 훈련시켜요 사람일은 모르니까

열심히 설명해요 편지가 도착할 곳을

알아들은 건지 모르겠어요 배고프면

편지를 쪼아 먹진 않을지 걱정되기도 해요


실은 비둘기들이 계속 아프고 쓰러졌어요

주소를 몰라서 비둘기들이 출발을 못했고

수북이 쌓인 편지를 몇 장 뜯어먹다가

거기 쓰인 감정이 부리를 통해 옮아

시름시름 앓았거든요 날개가 부러지기도 했고

어떤 비둘기는 계속 울기만 해요

울음의 내용은 번역을 못하겠어요


사랑하고 있어요


비둘기들이 뜯어 먹던

편지의 일부입니다

주소는 아직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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