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 우주의 외로움이 나를 부를 때

알폰소 쿠아론 감독. 그래비티

by 백승권




아이를 잃은 후

우주로 도망갔다


완전한 고요 속에서

슬픔을 재울 수 있었다


광활한 암흑 속에서

그녀는 생명이 아니었다


점이었고

먼지였고

모두에게 잊힌 존재였다.


기존에 발을 딛고 지내던 모든 곳의 밖이면서도

그 모든 곳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안 속에서

일에 몰두했다.


과거를 잊고

자신을 잊고

현재를 잊고

모든 것을 잊으려고

떠나려고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의 생명유지장치를 통해

공간을 유영하고 숨을 몰아 쉬었다.


여자는 산 자이자 죽은 자였다.

자신의 분신을 잃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중심을 잃은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지구 뒤로 솟는 태양빛이 없었다면

시간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곳


부서진 조각들이 덮치고

선이 끊어진다


단절된다

날아간다


더 먼 암흑과

더 깊은 침묵과 고요 속으로


그 지루하게 부여잡고 있던 생이

끝나가고 있었다.


산소가 고갈되고 있었다


동료가 대신 죽고

환상에 사로잡혀

그 동료를 다시 살려 내고

개 짖는 소리를 따라 하고

불길을 피해 헤엄치고


지금까지 살아있었던 관성은

여전히 살아있게 하려고 밝은 곳으로

그녀를 잡아당겼다


공포 희망 절망 희망 절망 절망 절망...


부서진 세상이 다시 부서지고 있었다

다시 시작하려면 계속되는 파괴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죽음이 잡아당기고

생명이 시동을 멈춰도

다시

다시

다시 시도해야만 했다


그것이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위로

그것이 자신을 향한 용서

그것이 모든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


금속을 녹이는 불길과

숨통을 틀어막는 물길을 뚫고 나와

젖은 흙을 딛고 파란 하늘 아래 섰을 때


여자는 마치 신의 짓궂은 시험을 통과한 듯한

표정으로 숨을 몰아 쉬었다.


중력에 저항하는 임무 속에서 사고를 겪고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다가

중력에 순응하고 나서야 모든 것을 되찾은

여자, 엄마, 인간


죽은 자의 꿈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우주는 여전히 대다수 인간에게

믿음으로서만 존재하는 영역.

완전한 고립을 꿈꾸는 인간이 도망치기에 적당한 곳.

그곳에서조차 생을 잇기 위해 죽음과 싸우기엔

스톤(산드라 블록)은 너무 가련해 보였다.


가족이 있었던 동료가 죽고

자신의 곁에서 농담을 나누던 동료마저 떠나고

살아야 한다는 의지 외에는

기댈 대상이 없는 절명의 상황 속에서

지구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

복잡하고 처절한 고난을 지나

생의 위대함을 증명한다는 설정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차라리 죽은 후의 꿈이었다면 편했을 것 같았다.

꿈에서 죽어도 꿈에서 깨어나도

기억에 사로잡혀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테니까.


상영 시간 내내 질식의 공포를 겪었다.

미간을 짓누르고 호흡기를 압박하고 있었다.

우주 다큐를 방불케 하는 사실감으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역사를 썼다.

다시 등장했던 조지 클루니의 미소는

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산드라 블록은,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배우도 우주과학자도 아닌 일반인 같았다.

상황 속에서 자신을 지운 듯 보였다.

그저 살려고 발버둥 치는 하나의

인간으로서만 기능했다.

굳이 산드라 블록이 아니더라도

대체 가능한 배우들이 떠올랐지만

자신의 색을 지워서 영화와

교감하게 하려 했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비티는 우울증 치료제 같은

영화로 회자될 것이다.

지구에서 겪는 고통이

얼마나 미약한 것인지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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