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더 레슬러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가장 서글픈 점이라면
후회할 일을 기어이 저지른 후 끝내 후회한다는 점이다.
이는,
전미를 뒤흔들던 스타 레슬러 랜디(미키 루크)가 세월이 지나 쇠락을 거듭한 후,
평생 등 돌렸던 딸(에반 레이첼 우드)과 가까스로 거리를 좁히고
관계 회복의 터닝포인트가 될만한 저녁 약속을 잡은 뒤
술과 마약에 취해 화장실에서 이름 모르는 여자와 섹스를 하는 바람에
딸과 연을 끊게 되는 장면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후회할 줄 알면서 술과 마약을 들이켜고
후회할 줄 알면서 사랑 없는 섹스를 하고
후회할 줄 알면서 대책 없이 쓰러져 자다가
한 여자의 인생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영영 지우게 한다.
영화 레슬러는 이렇게 랜디에게 아버지로서의 삶은 실패했다고 선고한다.
피와 땀과 수컷들의 함성으로 젖은 링 위에서
머리가 터지고 근육이 찢어지고 온갖 충격을 감내하기엔
심장은 전 같지 않았다.
근근이 집세라도 내게 하는 레슬링을 멈추지 않으면
대신 심장 박동이 먼저 멈출 수도 있었다.
무얼 먹고살아야 하나
잡부를 하거나
마트에서 샐러드 매장 점원을 하기도 했다.
야수를 가두기엔 너무 비좁은 곳,
그는 전동 칼날에 주먹을 쑤셔 박고
피를 흘리며 빠져나온다.
오랜 지인이자 술집의 댄서 캐시디(마리사 토메이)에게
마음을 보이지만 그녀 역시 그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이란 자신의 현재를 초라하게 만든 두려운 징조.
혼자 키우는 어린 아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엄마는 술집에서 가슴을 드러내고 춤추는 여자라고.
그래서 랜디의 호의는 고맙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레슬링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비디오를 파는 자리.
과거의 동료들은 현재 목발을 짚고 다니거나
휠체어를 타고 다니거나, 다들 불편한 몸과 행색,
초점을 잃은 눈빛과 희망 없는 표정으로
과거의 영광에서 멀어져 있었다.
돌아갈 수 없는 거리만큼이나.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내가 누군데.
왕년의 레슬링 스타 랜디인데.
그는 결정을 번복하고
돈도 받지 않고 경기를 뛰기로 한다.
심장이 멈출 수도 있고
그래서 죽을 수도 있다.
이렇게라도 불태우는 게
자기다운 삶이라고 선택한다.
그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링 위를 가른다.
희망은 쉽게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시간과 경험을 통해 배운 사람들에게
자 이것 보라고, 누구나 고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고
뻔뻔하게 보여주며 주입하는 영화만큼
식상한 것도 없다.
'블랙스완'과 '파이터'의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만들고
미키 루크가 한물 간 레슬러로 분투한 이 영화는
정면으로 식상함을 비껴나간다.
전 같지 않은 레슬링의 인기.
궁색하고 초라한 왕년의 스타.
주름진 얼굴과 기력
근육강화제와 각종 약이 없으면
한 경기도 제대로 버티지 못하는 몸.
실패한 아버지.
의사의 레슬링 불가 선언.
어색한 다른 일의 시작.
밀린 집세.
외로움.
교훈을 설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택할 것들이 점점 좁아지는 삶과
그 주변의 다르지 않은 군상들과
궁지에 몰려 자신을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보여줌으로 통해
인생이 순간의 결과가 아닌
지난한 과정의 연속임을
얼마든지 나빠질 수 있고
어떤 시도를 하든 더 나빠질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겪은 이들에게
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는 이들에게
선택을 강요당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에게
후회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 중 레슬러 랜디가 아닌 자 누가 있을까.
현명한 조언자나 불굴의 노력이 아닌,
순식간의 충동과도 같은 행동으로
결정되는 선택 역시,
이상이 아닌 현실과 맞닿아 있더라.
인간은 누구나 죽지만
완전히 죽기 전에 이미 죽느냐
끝까지 싸우다 마지막에 죽느냐의
차이는 많이 다를 거라고
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