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by 백승권

진짜 나라는 게 있기나 할까

빈정거림이 아니다

파도가 몇 개 지나가고

물기가 덜 마르고

모래는 여전히 묻어 있지만

나의 개수를 궁금해하다가

진짜 나라는 건 그저

환상과 허상이라는 늘 그렇게

귀결되는 결론에 이른다


차라리 도구가 되어 기능에 몰입할 때

톱니바퀴를 돌리려고 스패너를 놓지 않을 때

뇌의 온도를 높일 때

글의 세계의 일부가 될 때

내가 선택한 문을 열고 들어간다고 느껴질 때

나의 온전한 세계의 유니폼을 다시 입을 때

쓰는 나가 될 때 문장을 직조할 때

팩트와 의견을 분절하고

이미지의 세계로 초대하려 할 때

이를 위해 미지의 세계를 이해하려 들 때

세계관의 담장을 높이기 위해

벽돌을 하나씩 쌓아 올릴 때

실수하지 않으려 애쓸 때

그런 나를 내가 인지하며 하나가 될 때

내가 나를 내내 느끼지만

내가 원했던 나라서 이런 찰나는 귀해서

흩어질까 날아갈까 조심스러워질 때


내 등과 목덜미와 귓바퀴로

이미 날아와 박힌

수많은 화살과 창끝을 같이 느껴

이게 없었다면 나는 글을 쓰다 너무

단어와 문장을 그리다가 너무 좋아서

울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몰입을 둘러싼 가스층을 뚫고 날아온

날 선 흉기들이 내게 박히고 있어

폐를 찌르고 혈관을 자르고

시신경을 압박해. 거슬려 거슬리지

공기 중에 맹독성 포자가 떠다녀

마시면 반드시 죽게 되고 사실

오랫동안 노출되어서 조금 흡입되었을 거야

뱉으려고 발광도 했지만 시간은

정직해서 이게 면역인지 감염인지

어쨌든 휘젓는다고 사라지지 않아 그걸

감수하면서 감각하면서

감당하면서 감지하면서

백신을 맞을 날을 고대하고 있어


원하는 환경이 아닌 시간 속에서

원하는 행위라 여기는 글을 쓰며

화염 속에서도 타지 않는 종이와 펜을 가진 자처럼

뭔가를 쓰고 쓰려하고 거기에 기대고 있지


그러다가 파도 밖으로 얼굴을

겨우 내밀어 숨을 쉬다

생각이 든 거야. 그놈의 생각...

가짜의 몸으로 진짜의 일을 하는 건가

삶은 계란 노른자 같은 건가

미래의 병아리는 죽었고

퍽퍽한 노랑 가루만 남은 건가

무슨 소리야 이게


가짜로 살고 있는 건 익숙해

그런데 진짜를 100%라고 가정하면

내게 진짜는 없어

내가 진짜라고 인정할만한 역할이 없어

열거하는 것조차 우스워

내가 누구든 나는 내가 정의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게 단 하나도 없어

단 하나도. 전부 다 척척척만 하고 있어

전부 다 연기하는 거야

연기를 하다가 진짜에 다가간다고

믿던 날도 있었지. 허황되고

가엾기까지 한 자기세뇌의 효능을

오랫동안 섬겼어. 이게 매우 중요하다 여기며

그래서 난 그런 존재가 되었나

타인의 기대에 부흥하는

텅 빈 비닐봉지 같은 뇌가 되었냐는 소리가 아닌

아니 그러니까 내가 인정하는 내가 되었냐고

내가 그토록 오래 시도하던 연기가

그게 그렇게 날 진짜로 완성했냐고

내가 날 진짜로 인정하냐고.... 절대 아냐!

이게 지금 도달한 지금까지의 중간 정산이야

지겨워. 늘 중간이지. 끝은 있기나 한가

난 진짜가 아니야... 아닌 걸 절감해서

이런 걸 벽화 속 쟁기 끄는 소 그림처럼 끄적이고 있지


내가 없어.

일에서 자아를 찾지 마라 어쩌구... 이런 게 아냐

하나의 무대 위에 칸막이가 있고

각 칸을 돌아다니며 옷을 갈아입고

스타일을 바꾸고 표정과 언어를 갈아 끼우며

여러 역할을 동시 다발적으로 연기하고 있는데

단 하나도 내 맘에 진짜라고 여겨지는 게 없어

각각 전부 다 불안하고 불편하고 이질적이고

방해요소가 너무 많고 문제가 끊이지 않고

해결은 기미조차 없고 모든 게 불타고 허물어지고

다시 새것으로 만들고 누가 다시 부수고

그를 제거하고 싶고 다시 알고 싶지 않은 이유로

다치고 쓰러지고 목소리를 잃고 피눈물이 흐르고

오한이 멈추지 않고 부러진 뼈는 비뚤어져 붙어 있고

이게 진짜야? 현실의 프레스기에 너무 짓눌려서

내가 평면인지 점선면인지 포자인지 그저

개념인지 0과 1인지 모르겠어

나라는 존재가 존재하긴 한가

온통 타자의 의도로만 지정된 동선을

움직이는 대상에 자의식이라는 가짜 이론을

덧입힌 건 아니고?


고장 난 기계가 되어

부서진 공장으로 실려가며 기록함


애초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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