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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진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진짜 길을 잃은 게 아니었으니까

진짜 길을 잃었다고 생각만 한 거예요

진짜는 생각이 아닙니다

생각은 진짜가 아니고


진짜 길을 잃은 사람은

진짜 길을 잃은 사람을 알아봐요

모를 수가 없어요

대형 거울이 눈앞에 있듯

같은 처지의 생명체가

같은 얼굴의 시체가 되어

돌아다니는 걸 모를 수가 없어요

저기 내가 지나가고 있으니까


알아봐요 진짜 길을 잃어본 사람들은

마주쳐요 진짜 길을 잃어본 사람들은

그러다가 각자 잃어버린 길 위에서

이어져요 어떤 순간 어떤 방식으로든

같이 가냐 아니냐

서로 돕냐 아니냐는 이후의

선택과 결정의 문제


외딴곳에서 처량한 자신을 마주하면

몸과 마음과 시간과 공간이 움직여요


길을 잃었어도 조금 괜찮은 기분이 들어요

자신이 타인 같고 타인이 자신 같아서

느리게 걸어도 속도를 맞추고

천천히 먹어도 기다려 주고

오래 이야기도 들어주니까

내가 커지고 많아지고 괜찮아진 것 같아요


나의 원본과 성분을 바꾸기도 해요

심장과 뇌와 뼈를 갈아 끼워요

새로운 기억으로 피와 신경을 교체해요

방향감각에 대한 인식을 리셋해요


잃어버린 길은 그때부터

새로운 길이 됩니다


누가 신경을 쓰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다시 길을 잃어도 상관없어요

혼자가 아니니까

길을 잃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같이 잃은 게 더 중요해져요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될까 봐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더 정신을 차리려 애써요


그래도 길은 잃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똑바로 앞을 보며 걸어도

그래도 길은 잃기 마련이에요

아무리 계획과 비전이 완벽해도

그래도 길은 잃기 마련이에요

아무리 희망과 긍정이 넘쳐도

그래도 길은 잃기 마련이에요


길은 인식으로만 존재하거든요

길은 처음부터 실체가 없었어요

혼자가 될까 봐 두려움에

길이라는 허상을 창조했어요


처음부터 길은 없었어요

처음부터 둘도 아니었고

혼자를 인정하기 싫어서

계속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어요

혼잣말을 하며 이런 글을 쓰며


진짜 길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진짜 길을 잃은 게 아니었으니까

진짜 길을 잃었다고 생각만 한 거예요

진짜는 생각이 아니에요

생각은 진짜가 아니고


이건 믿음의 문제예요

옳고그름의 문제가 아닌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닌

남녀노소의 문제가 아닌

스트레스의 문제가 아닌

이건 그저 믿음의 문제예요


진짜 글이라고 쓰면

아무도 읽지 않아요

진짜 글을 쓴 게 아니었으니까

진짜 글이라고 생각만 한 거예요

진짜는 생각이 아니에요

생각은 진짜가 아니고


어렵다고 여기는 거 알아요

이건 글이 아니어서 그래요

여긴 길이 아니어서 그래요

우린 꿈이 아니어서 그래요

지금 앞이 안 보여서 그래요


끝이 안 나요

시작한 적 없어서

일부러 그랬었죠

끝내기 싫어서

시작하지 않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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