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시집 <죽음의 자서전>
죽기 전부터 고아인 죽음이 탄생하는 장면
평생의 모든 순간들이 너무 우스워
죽은 여자는 웃다가 울었다
누가 한 사람을 데려가고
여기 장작더미 위에 그의 인형을 갖다 놓았을까
오늘만 좀 재워주세요 하더니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 손님처럼
몸이 다 타도록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네
나는 죽기 전에 죽고 싶었다.
-김혜순 시집 <죽음의 자서전> 중
어떤 책과 작가는 아얘 모르고 지내다가
다른 누군가가 불러줘서 알게 되는데
박찬욱 감독이 언급한 수전 손택이 내 생을 바꿨고
신형철 작가가 감탄한 수많은 시집들이 집에 수북하고
해외에서 먼저 알아본 한강 작가들의 책도 그러해요
김혜순 시인의 시집도
해외 수상작이라는 수사가 없었다면
쉽게 지나쳤을테고
물론 무심하고 잔혹한 표현이
먼저 걸리지 않았다면
애써 펼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서점에서 집으로
책의 입양을 결정하는
순간의 취향이란
너무나 강퍅한 것
가장 오래 머문 문장이었으나
옮겨 쓰지 못한 내용 중에
어미 돼지가 새끼 돼지를
잡아먹는 표현이 있었어요
김훈 작가의 책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는데
시어가 자신의 한 줄을
보도사진처럼 그려낼 때만큼
섬뜩할 때가 없고
남은 자가 되어 이미 죽은 자들의
풍경을 자백하듯 묘사할 때
시인은 주체가 아닌 같은 시체가 되어
그들의 들리지 않는 말을 받아 적어요
여러 번 죽어가며
여러 번 불타가며
여러 번 빠져가며
여러 번 울어가며
미친 듯 웃어가며
죽은 자들의 사라진 그림자를
흉내 내고 적고 흉내 내고 적어요
시집을 펼치기 전에는 알 수가 없어요
종이 질감을 스삭거리며 넘기기 전까지는
느끼지 못한다. 전자책에서는 향내가
나지 않아요. 상복의 질감도
무덤의 추위와 관 위에 떨어진 눈물도
잘 보이지 않아요
한 권의 작은 책을 덮을 때마다
그 위를 짓누르는 작가의 시간들이
너무 무겁고 두렵습니다
망설이고 지우고 자괴감에 빠지고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쓰는 내내
확신하지 못하고 이런 괴로움을
자기만 겪고 부끄러운 흔적을
자기만 알아보고 그래도 쓰고
어리석다 여기고 그렇게 어리석어지고
글쓰기를 향한 탐닉은
전생의 지은 죄에 대한
이번 생의 형벌에 가까운 것
대가를 치르는 모두가 다르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며
제대로 표현조차 불가능해요
심지어 눈에 띄지도 않아요
https://www.ndbooks.com/book/autobiography-of-dea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