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이지 않는 법

클랜시 마틴. 나를 죽이지 않는 법

by 백승권

혼자 있을 때 깨닫는 건 내가 나를 죽이려 한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다.


자살 이야기를 읽으며 등골이 오싹하게 만드는 건 창살에 매달린 힘 빠진 시체가 아니라, 바로 직전 그 사람의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이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영원히 살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 공포의 순간만 넘기면 모든 것이 이전보다 더 쉬워질 것이다. 반드시 자살해야 한다면 언제든 내일 해도 된다. 하루만, 하루만 기다려라.


6) 삶의 가치에 대해 논쟁하거나, 그들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함부로 조언하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는다.


자살은 아주 쉽게 몸에 배는 습관이며 끊기가 극도로 어렵다.


앤드루 솔로몬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그가 비슷한 이야기를 해서 깊이 공감한 적이 있어요. 우울증에 관한 거예요. 그는 자신이 우울증을 겪은 적이 있고, 앞으로 또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어요. 스스로 인정해야 우울증을 이겨 낼 수 있다는 말이죠. 자살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리 아무 방법이 없다고 느껴서 자살 직전까지 갔을 때도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고, 그들도 자신이 어렵게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문제가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실제로 도움이 됩니다.


우울이 가져오는 슬픈 저주 중 하나는, 이게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기분을 안긴다는 점이에요.


자기 삶을 스스로 끝내면 더 이상 우울증이 발병할 일은 없으니까요.


흔히 자살하려는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그들의 기분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최선의 접근법이 아니에요. 그들이 자기 기분 그대로 느끼게 해주세요.


저는 자살을 시도한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당신은 이제 선물을 받았어요. 이게 무슨 말인지 싶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당신은 남들이 할 수 없는 방향에서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할 수 있어요.” 자살을 기도한 적 있는 사람들은 자살 성향에 대해 진정한 전문가예요.


누군가가 자살하려 한다면 그들이 끝내고 싶은 건 자기 삶이 아닙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바꾸고 싶은 부분이 있을 뿐이에요


한 나바호족은 인터뷰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살한 이들을 더 두려워합니다. 그들은(자살한 이들은) 늘 미친 상태죠. 자살하려 할 때 미치게 된 겁니다. 살아난다 해도 이미 미친 상태인 거죠”라고 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를 둔 쇼펜하우어 사고일 수도 있지만, 그의 가족들은 자살로 보았다.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우울하고 불안했고 나이가 들며 정신적 고통이 심해졌다.


자살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아주 악랄한 형태의 허영심입니다. 자부심이기도 이기심이기도 하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겠죠. 영악하고 깊고 강한 특성이 있기 때문에 제가 압생트 이야기를 한 겁니다. 압생트는 아주 독한 술이죠. 알코올 도수가 80%나 되니까요. 그래서 모두가 좋아하진 않지만, 중독되는 술이죠. 아주 독해서 소량만 마셔도 강렬하니까요. 그래서 쉽게 중독될 수 있습니다. 그런 건 아주 많습니다.


왜 욕실일까? 알 수 없다. 아마 그저 욕실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모든 것을 재빨리 해치웠을 것이다. 어쩌면 올가미를 견고하게 매달기 적당한 장소였을 수도 있다. 차고와 지하실에서 목을 매 자살하는 일이 잦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런 장소에는 보통 매달리기에 충분한 높이의 목재기둥이 있는 경우가 많다. 보데인은 키가 195cm이므로 목을 맬 수 있을 만한 높이인지가 그의 마지막 시간, 아니면 얼마 안 되는 마지막 몇 분간 실질적인 고민 중 하나였을 것이다. 총으로 하는 자살과 달리(편리한 권총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목을 매 죽는 일은 약간의 시간과 계획이 필요하다. 작가인 세라 데이비스는 자신의 회고록인 《한 번 또 한 번》에서 “밧줄은 싸지만, 목매다는 일은 정말 전문적인 일이다. 아마추어가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기엔 상당한 위험이 있다. 그나마 아무도 관련 없다는 게 다행이다”라고 했다. 한편 욕실, 차고, 지하실은 다른 이들이 보지 않는 내밀한 장소이기도 하다. 양치를 하고 머리를 빗고 몸을 자신에게 노출하고 체중계에 올라가 몸무게를 확인하며, 대소변을 보고 자위를 하는 곳이다. 죽기엔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우리는 세상을 떠날 때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있길 바란다), 자살하기에 특별히 안전하고 알맞은 곳이기도 하다. 혼자인 것에 익숙한 홀로 있는 공간이다.


중국에서는 자살로 사망한 전체 수의 약 절반이 살충제에 의한 것이며, 인도에서는 거의 40%에 이른다. 세계적으로 자살 시도의 90%가 음독과 관련 있지만, 치명적인 독을 구하는 게 상대적으로 어려운 미국에서는 가장 흔한 자살 방식이 총기다. 자살을 줄이기 위해 이스라엘에서는 방위군 병사들이 주말에 집으로 갈 때 총기를 가지고 가지 못하게 하자 자살률이 40% 하락했다. 선택적으로 위험한 살충제를 금지한 스리랑카에서는 자살률이 50% 가까이 감소했다.


자살을 막는 데 금기를 사용한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중국의 지역 행정관 황류훙은 담당 행정 구역의 가난한 시민들 사이에 특히 자살자 수가 증가하는 데 놀라 자살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끔찍한 재앙을 설명하는 유명한 운문 한 편을 지었다. 가족들은 벌을 받고, 자살한 이들은 사후 세계에서 고문으로 고통받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 정책을 시행한 지 반년이 지나니 그 지역 주민들이 내 메시지를 받기 시작했고 자살 건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1년이 지난 후에는 자살이 한 건도 보고되지 않았다. 많은 불필요한 죽음을 막을 수 있었고 나는 유쾌하지 못한 많은 여행(자살 사건인지 확인하러)을 가지 않아도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나는 항상 살아 있는 것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다.’ 애나 보저스


마인렌더는 자신의 염세주의를 담은 명작인 《속죄의 철학The Philosophy of Redemption》을 썼고, 첫 번째 책이 출간되고 얼마 안 돼 숨졌는데, 자신의 책 더미 위에 서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학자이자 작가, 철학가였던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는 토리노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건물 계단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기 때문에 그의 자살은 많은 이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지만, 사실 강제수용소 생존자들 중에 트라우마로 인한 자살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엘리 위젤Elie Wiesel은 레비의 자살에 대해 “프리모 레비는 40년이 지나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라고 기록했다.


고대 로마의 작가와 철학자들은 자살에 대해 보통 관용적이었고 심지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칭찬하기까지 했다.


케스틀러는 그의 유서에 “내가 내 인생을 끝내기로 한 이유는 단순하고 강제적인 것으로, 파킨슨병과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할 다양한 백혈병 변종CCI 때문이다”라고 썼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실업자가 늘어나고 봉쇄 조치로 불확실성과 절망감, 코로나19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 늘어나고 일을 하는 도시에서 고향으로 가지 못하게 되면서 커플 간의 동반 자살 사례가 증가했다


로미오는 단지 줄리엣이 죽었다고 생각해서 자살하고, 뒤이어 줄리엣은 로미오가 자살했기 때문에 자살한다. 셰익스피어는 많은 시간을 자살에 관해 생각하며 보냈으며 여러 면으로 자살에 대한 뛰어난 사상가라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 여덟 편에 14건의 자살이 나오며, 그 대부분에 자기파괴에 대한 놀라운 심리학적 통찰이 담겨 있다.


클라이스트의 ‘진실로 세상의 어떤 것도 나를 도울 수 없었다’라는 문장은 그의 절망에 대한 증거로 자주 거론된다


자살을 시도한 이 중 열에 아홉 명은 그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들 중 단 7%만 다시 자살을 시도한다. 그리고 다시 자살을 시도한 사람 가운데 약 23%가 죽지 않고 살아나며, 나머지 70%는 또다시 자살을 시도하지 않는다.


치료는 끔찍할 정도로 고통스러웠고 그동안 코워트는 의식을 잃고 기절할 때까지 소리지르곤 했다. 치료받는 내내 그는 제발 죽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그 바람은 존중받지 못했다. 이후 댁스 코워트는 살아 있는 데 감사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이 원했을 때 죽음이 허용되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대가 자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대화로 풀어 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장 끔찍한 우울감에 사로잡힌 이들 대부분은 어떤 이유로든 비현실적 절망감에 빠져 있고, 과장된 불행과 현실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치명적 위협에 시달린다. 스스로의 무가치성과 그에 상충하는 삶의 가치를 놓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친구, 애인, 가족, 그들을 지지해 주는 사람들의 종교적 수준의 헌신이 필요하고, 실제로 그런 헌신이 수많은 자살을 막아 왔다.


좀 바보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나 자신에게 자주 이렇게 말한다. “네가 지금 자살하려고 하는 거 알아. 그런데 꼭 서둘러야 하는 건 아니잖아. 네 모든 게 곧 다 사라질 텐데 그 전에 영화나 한 편 보는 건 어때?”


앤드루 솔로몬은 내게 위기의 순간을 통과하는 한 가지 비결은 이전에도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고 위기를 이겨 냈으며 반대편에서 기쁨을 발견한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다


압박감은 세상이며, 세상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이지만, 스스로 자신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자기가 괜찮은 상태가 아니라는 시각은 끔찍하고 잘못된 것이지만 한편 매우 흔하고 이해할 만한 것이다. 압박감을 덜어내는 게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가끔 일의 압박으로 극도의 공황 상태에 빠질 때면 나는 절대 회신할 수 없을 것 같던 이메일에 답하는 행위만으로 갑자기 조금은 숨 쉬기 편안해지는 경험을 하곤 했다. 때때로 압박감 때문에 아무것도(일, 결혼, 육아,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다니기, 아기 때문에 새벽 5시에 일어나기, 글쓰기, 친구 관계 유지하기, 침대 정리, 빨래 개기... 정말 너무 많다) 못 하겠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는 그저 살아가기만 하면 더 나은 죽음을 맞는다는 제안이 마음에 든다. 적어도 내가 아는 외롭고 수치스러운 죽음은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파울 루트비히 란츠베르크는 “잘못된 것은 고통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고통을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는 환상이다”라고 했다. 란츠베르크의 말은 우리가 고통을 겪을 것이고 그것은 힘든 일이라는 의미다


네가 고통받을 때 네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어느 시대고 의사들은 운동과 체조, 승마, 경작, 여행 등을 권해 왔다.


심리적 건강에 기여하는 것과 해가 되는 것에 대해 아주 작은 사항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한 번 또 한 번》은 데이비스 자신의 두 번의 자살 기도를 시간순으로 기록한 것이다. 내가 유독 이 책에 끌린 이유 한 가지는 작가가 결국 자살로 사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처럼 데이비스도 작가이고 자살 기도자였지만 그의 이야기는 해피엔드였다.


자살 시도자들은 자신이 자살에 성공한 사람들과 달리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그리고 동시에 삶의 시험대 앞에서 자살을 떠올린 것은 비겁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비웃게 된다


우린 지금 여기 함께 있다. 해낸 것이다. 죽고 싶지 않다. 아직까지는.


내가 마지막으로 자살을 기도한 곳은 우리 집 지하실이었고, 그때 나는 개 목줄을 사용했다. 늘 그랬듯 유서는 쓰지 않았다. 나는 서재에서 초록색 가죽을 씌운 나무 의자를 지하로 가지고 내려갔고, 우리 집 개가 그 모습을 계단에서 지켜봤다. 개는 지하실을 무서워했다. 나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 내 목에 올가미를 씌웠다.


나는 자살 욕구를 깊이 이해한다.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어릴 적 기억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 충동이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는 동안 존재감에 짓눌린 채 그 존재를 끝장내야겠다는 생각에 휩싸이지 않은 적은 내 인생에서 거의 없다. 고작 몇 주도 되지 않는다. 나는 몇 번이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금문교에서 뛰어내리는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살아남은 켄 볼드윈Ken Baldwin은 이후 그 일을 언급하며 화제가 되었다. 그는 다리에서 뛰어내리던 순간,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완전히 고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방금 뛰어내린 행동만 빼면 말이다.”


인생의 고비에서 심리적 고통으로 무너지는 경향, 야망과 허영심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남과 비교하는 의식의 증가, 병이나 죽음에 대한 환상에 이르기까지. 이런 특징은 타인에 비해 자신의 가치가 훨씬 높다는 견고한 믿음과 함께 나타난다. 유아기에 보이는 자살 의지의 표현으로 흔히 사소한 문제에 느끼는 깊은 슬픔, 굴욕을 경험할 때 병이 나거나 죽고 싶어 하는 강한 바람... 그리고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바람을 충족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기는 타인에 대한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난 자살하려던 게 아니야, 클랜시.” 누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저 그 집에서 벗어나려 한 거지.”


자살하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기대 도박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얼어 죽으면 짧은 고통 후에 놀랄 만큼 행복해진다고 어디선가 읽은 적 있었기 때문에 바로 그렇게 죽기로 한 것이다. 또 일부러 벌거벗은 채 동사한 시체를 내 헌신적인 사랑과 상대방의 배신 증거로 남겨 내가 얼마나 자기를 사랑했는지 보여 주려는 생각(지금이야 선물하겠다고 자기 귀를 자르는 것만큼이나 억지스럽게 느껴지지만)까지 했다.


나는 옷을 벗고 눈 위에 누웠다. 눈은 흰색이었다가 파란색이 됐고 또 녹색으로 바뀌었다가 분홍색이 되었다. 처음에는 추워서 몸을 덜덜 떨다 미친 듯이 일어나고 싶어졌고 극도로 추워지니 말 그대로 더는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온기와 감사에 휩싸였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그대로 얼어 죽었어야 했는데 지나가던 행인이 나를 발견했고 나는 병원에서 깨어나 며칠간 정신과 병동에 있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건 어이없을 만큼 힘든 일이에요. 그러니 그 사실을 인정하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요. 본인과 우리 모두를 안쓰럽게 생각하세요!


나는 자기 연민이 자기과시의 이면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지금 당장, 오늘, 이 순간, 지난 몇 시간 동안, 지난 몇 주 동안 정말 자살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나? 그렇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생각인가? 아니다. 왜 아닌가? 결과가 두렵다. 그 결과가 자살의 결과보다 더 심각한 것인가? 아니다. 무엇을 하려 하는가? 내가 하려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항상 이런 기분이 드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늘 그렇게 느끼지도 않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려 한다.


정신과 의사이며 자살 전문가인 네이선 클라인Nathan Kline19이 이런 심리 상태를 아름답게 요약했다. “그는 자기 기준을 잣대로 의지와 정신 테스트에 실패한 것이다. 자신의 유약함을 탓하며 다른 이들도 그를 탓할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극심한 고통이나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이런 시도는 상당히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핵심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우울한 기분이 들면 이렇게 되뇌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과제 전체)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우울한 채 두자. 아플 테지만 그래도 괜찮으니까.


장 자크 루소의 걸작 《쥘리Julie》에도 자살의 윤리에 관한 대화가 나오며, 자살을 옹호하는 측에서조차 “인간은 모두 자연으로부터 죽음에 대한 커다란 공포를 부여받았고, 이 공포가 인간이 가진 조건의 비참함을 보는 우리 눈을 가려 버린다. 그래서 오랜 세월 고통스럽고 비통한 삶을 참고 견디다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피로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고 삶이 극도로 끔찍해지면 최대한 빨리 삶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사실 나처럼 반복적으로 자살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가장 짜증 나는(그리고 매우 치명적인) 질문 중 하나는 “자살 시도는 왜 성공하지 못한 거죠?”이다. 정중하지는 않아도 타당한 질문이긴 하다. 우리같이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안다. 그래서 내가 줄 수 있는 대답은 다른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자살도 보기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또 다른 답 역시 모든 일이 그렇듯 자살에 성공한 사람들 대부분이 성공하기 전부터 연습을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다른 경쟁적 욕구와 함께 자기 소멸 욕구가 있다면 자살 기도는 그 동기를 찾기가 쉽지 않은 사안이다. 자살하려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죽고 싶은지 살고 싶은지 헛갈리는 모습은 의외가 아니라 일반적인 것이다.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자살 시도에 어떤 주저함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고 가정하기 전에 우선 자살이 실제로 얼마나 어려운지상기할 필요가 있다. 시도해 보기 전에는 쉬워 보이는 법이다. 젊은 시절에 친구와 함께 독성이 있는 풀인 ‘다투라Datura’를 먹고 자살을 시도한 적 있는 마하트마 간디가 자신을 찾아와 자살을 생각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그리 걱정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다. 심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자살이라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찾아보면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이가 절벽에서 뛰어내렸는데도 희한하게 바람에 밀려 끔찍한 높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 우주는 자살하려는 이들에게 그런 장난 치는 걸 좋아한다.


가장 흔히 선택하는 ‘실패할 리 없는’ 방식은 총을 쏘는 것이다. 두 번의 자살 기도를 하고 그 경험에 관한 회고록을 쓴 작가 세라 데이비스Sarah Davys는 특유의 비꼬는 말투로 총으로 하는 자살을 “최상의 방식”이라고 표현하며 곧바로 덧붙이길, “우리 중 소수의 사람만이 권총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총은 잘못하면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데이비스는 1960년대 영국에서 이 글을 남겼다. 요즘은 불행히도 거의 모든 미국인이 권총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


나는 총으로 하는 자살이 늘 유난히 두렵게 느껴진다. 행동의 폭력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런 시도를 한 후 살아날 경우의 신체적 결과가 처참하기 때문이다. 2020년 4월 16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캘리포니아에 봉쇄령이 내려지고 얼마 후, 드루 로빈슨Drew Robinson이라는 스물여덟 살 청년이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대고 총을 쐈다. 총알은 그의 오른쪽 두개골을 으스러뜨리고 오른쪽 눈을 망가뜨릴 정도까지만 나가다 멈췄다. 총을 쏜 지 스무 시간이 지나 자신의 아파트 거실 바닥에서 의식을 회복한 로빈슨은 911에 전화했다. 이후 1년간 신체적·심리적 치료를 받은 그는 자신이 살아난 건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 중 50%가 약간 넘는 수가 총을 사용했으며, 남성 대비 여성의 자살 시도율이 3배 가까이 높음에도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는 남성이 더 많은 이유는 남성의 총기 사용 비율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2020년 미국에서 자살로 인한 100명의 사망자 중 약 70명이 남성이고 30명이 여성이었다. 그 반면에 같은 해 남성 1명의 자살 기도당 여성 자살 시도 수는 3명이었다. 여성의 자살률은 지난 몇 년 대비 천천히 증가하는 추세다).


보데인은 자신의 노력과 재능으로 성공을 일궈 냈다. 그는 끈질긴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룬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보데인은 유난히 각계각층의 많은 사람들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았는데, 아마도 그가 우리 자신을 믿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데인은 모든 사람과 편하게 어울렸으며, 상대가 돈이 많거나 적거나, 명성을 가졌거나 별 볼일 없거나,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숙련된 사람이거나, 유명인이거나 일반인이거나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단지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좋아하고 존중했다. 하지만 이 원기 왕성하고 사랑에 빠졌으며 본인 커리어의 정점에 서 있던 예순한 살의 남성은(덧붙이자면 자기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으며, 젊음의 광채와 함께 어떤 지혜가 싹틀 거라 기대되던 나이였다) 홀로 죽음을 맞았고, 그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79만 4000명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만성 우울증을 앓거나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지도 않았다.


“이건 순간적인 절망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그 순간만 잘 넘겼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거예요.”


자살 전문가들이 대부분 동의하는 한 가지는 가능하다면 자살 충동이 있는 사람에게 지금 어떤 상황인지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며 대담하게 질문하라는 것이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질문에 답하다 보면, 자살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정서적 여유를 되찾을 가능성이 높다


1989년에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스타이런William Styron16은 자신의 우울증과 자살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누구도 자신이 어쩌다 우울증에 걸렸는지 결코 알 수 없는 것처럼 나 또한 내가 ‘왜’ 우울증에 걸렸는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를 밝혀내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비정상적 화학 반응과 행동, 유전적 요인같이 여러 가지 원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서너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끝없이 많은 요소가 섞여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왜 자살을 했는가 하는 물음에 단 하나의 직접적인 답(어쩌면 복합적인 답일지라도)이 있다고 보는 게 자살에 대한 가장 잘못된 생각이라고 한다.”


친구이자 동료인 철학자 한 명이 최근 내게 글을 보내왔다. “삶에서 단 일주일이라도 ‘그냥 이 생을 끝낼 수만 있다면 모든 게 얼마나 좋아질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가장 행복했을 때조차 그랬죠. 어떤 땐 순식간에 자살 생각에 빠지는 것만으로 바로 안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나는 이에 대한 답장으로 누군가 자신에게 자살 성향이 있음을 이해하는 이 같은 사고방식이 매우 건강한 것이라고 했다.


여보, 나는 다시 미쳐 가는 게 틀림없어요. 이런 끔찍한 시간을 다시 겪을 순 없죠. 이번에는 회복되지도 못할 겁니다. 누군가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고 집중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최선으로 보이는 일을 하려 합니다. 당신은 내게 가능한 최고의 행복을 주었어요. 그리고 모든 면에서 가능한 모든 존재가 되어 주었죠. 이 끔찍한 병이 덮치기 전까지는 우리 두 사람이 그보다 더 행복할 순 없었을 겁니다. 저는 더 이상 병에 맞서 싸울 수 없어요. 내가 당신 삶을 망치고 있고, 나만 없으면 당신이 일도 할 수 있으리라는 걸 압니다. 당신은 그럴 수 있다는 걸 알아요. 내가 이 글조차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걸 알겠죠? 읽지도 못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 삶의 모든 행복은 당신에게서 비롯됐다는 거예요. 당신은 나에 대해 전적으로 인내해 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잘해 줬죠. 모두가 다 아는 일이지만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누군가 나를 구해 줄 수 있었다면 그건 당신이었을 겁니다. 내게서 모든 게 사라졌지만,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은 남았습니다. 더는 당신 삶을 망칠 수 없어요. 우리보다 더 행복한 부부도 없었을 겁니다. - V.


이상 본문 발췌.


많은 분야가 그렇듯 자살 역시 이제는 내게 연구 대상이다. 안구가 파일 때까지 문지르며 울다가 현실의 스티커를 몸에서 직접 떼어놓고 싶을 생각도 했지만 개인소장품이라고 단언하기 어려운 사회적 연결 구간의 일부에 있어서 브레이크를 자주 밟아야 했다. 고요한 자살 충동 같은 건 있었다. (아주 아주 오래전) 당시 8주 연속 새벽 퇴근, 밤샘, 주말 출근하고 대낮 귀가 중이었다. 굉음으로 지나가는 차 앞으로 뛰어들면 내일은 밤샘 업무 안 해도 되겠지... 같은 귀여운 망상을 했었다. 순간 그런 충동에 휩싸인 걸 빠르게 자각하고 차선에서 다시 거리를 둘 수 있었다. 다른 경우는 저렇게 외형적이지 않다. 심리적 저항이 거세었고 그 과정에서 내면이 납작해지기도 했다. 폐차된 차에 들어가 프레스 기계에 압착된 것처럼 정신이 훼손되었고 여전히 일부는 그때 그 시절에 살점이 분리되어 있다. 몇 가지 더 나열할 순 있어도 자살을 열 번 시도했다는 저자가 쓴 본문에 언급된 사례에 비할 수 없다. 언급된 이들 대다수는 그때 시도를 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을 타자화 하면 자살은 남의 죽음, 남의 일이 된다. 실행 주체가 자신이지만 피해 및 손상 대상과 거리를 둘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한'다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자살'을 해치운다 정도로 '결과'를 낼 수도 있다고 여길 수 있다. 자살을 하나의 목적으로 두고 작은 단계씩 하나씩 처리해 나가면 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읽다 보니 자살은 하나의 문제이자 대상이었다. 성공한 사람은 지상에서 사라졌다. 실패한 사람들은 부상당했거나 생존을 통해 남겨졌고 살아남은 자로서의 여정을 지나는 중이다. 자살을 하나의 계획으로 편입시키는 과정만큼이나 실행하는 과정 또한 첨예한 집중과 준비가 필요하다. 자살이 하나의 업무, 일처럼 느껴졌다. 저렇게 많은 단계를 뚫고서야 자살을 실행하고 성공에 이를 수 있구나. 자살이라고 하면 훼손된 사체, 슬픔의 도가니 같은 사후의 비극적 상황만 주로 떠오르지만 자살 당사자들이나 자살 후보자들에게는 자살은 하나의 티켓팅 과정과도 같다고 여겨졌다. 거의 모든 인간이 비슷한 사이즈의 신체를 가지고 여성의 몸 안에서 바깥으로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듯 자살 과정 또한 극단적인 정신 상태와 물리적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다층적인 증상에 휘말린 몸이 세뇌당하여 움직이듯 이런 과정을 차분히 준비해 나간다면 자살 성공률은 더 높았겠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변수가 발생하고 시도 후에 성공률 실패율 이렇게 불리게 된다. 하나의 실험처럼.


저자 클랜시 마틴은 자신의 자살 시도와 실패, 당시의 정신 상태와 과정, 가족과 친인척의 자살 가족력, 친구 및 지인의 자살 케이스 등 공기처럼 가까이 존재했던 자살 사례에 대해 들려준다. 자살 시도자와 실패자로서 자살에 대한 이런 책의 저자로서 알맞을 것이다. 궁금한 점은 그가 세 번 결혼했고 다섯 명의 자녀가 있다고 했는데 그의 불안한 내면과 자살 시도 이력이 과연 (그를 아빠라고 부르는) 자녀들에게 얼마나 영향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친인척을 포함한 자살로 가득했던 그의 환경에 못지않게 그 또한 자녀들의 성장 환경에 영향을 미쳤을 텐데 그저 다양한 룰을 지닌 사람들이 엉켜 사는 세상 속에서 너희들은 자살 시도를 자주 했던 어느 성인 남성의 자녀로 태어난 운명일 뿐이란다... 이런 식으로 정리했을까. 저자의 불안한 내면 및 어린 시절과 저자의 자녀들이 물려받을 내면적 DNA는 별개의 문제가 될 수 있나. 아닐 것이다. 이런 의문은 저자에 대한 검증이 아니다. 본문에 언급되지 않은 또는 편집되었을지 모를 부분에 대한 궁금증이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에 몰린 이들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과 방지를 위한 이해와 설득의 시도를 의심할 수는 없다. 자살 분야에 대한 다양한 성격의 지식인 및 저자들은 존재하지만 대중서로 이런 문장과 구성으로 체계적으로 이해와 상황 파악, 대비책을 지원하는 책은 경험하기 쉽지 않았다.


'나를 죽이지 않는 법'에 실린 자살에 대한 다양한 사례 분석과 다층적 관점 및 해석들은 그동안 (내가) 개인으로서 얼마나 심층적인 고민으로 자살을 떠올렸든 앞선 누군가가 했겠구나 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누군가는 지금도 욕실 거울을 보며 어떻게 죽을지 계산 중이고 누군가는 이미 니체의 사후 기념일에 맞아 스스로 숨을 거두기도 했다. 실제 자살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된다면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이기 힘들다. 삶의 이유도 자살에 대한 고민도 그만두기 위해 자살을 감행하고 싶어진다. 자살을 위한 자살보다는 자살에 이르게 한 고통의 원인과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살을 원하게 된다. 이성과 감각의 제어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누군가는 결과에 이른다. 그들은 저 책과 이 글을 읽을 수 없다. '무조건 안돼'는 없다. 자살의 경우도 마찬가지. 저자 역시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자살은 지옥행!"처럼 자살의 해악에 대해 부르짖지 않는다. 나는 종종 자살을 준비하는 피로감에 대해 떠올리며 억제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만약 밧줄을 사야 한다면... 밧줄의 가격을 미리 알아보거나 밧줄을 걸 곳을 사전 답사 해야 한다거나 밧줄을 걸기 전 실패 가능성에 대해 가늠해 보거나 밧줄 자국이 목이나 신체에 남았을 경우 어떤 변명을 준비해야 하나 등 나는 아직 자살을 각오하거나 추진에 이르는 적극적 실행 단계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지 도 모른다. 자살을 좋고 나쁨으로 이야기하긴 힘들다. 다만 개인 한 명이 의자를 치우는 게 아닌 연결된 모두의 의자를 쓰러뜨리는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연결된 이들의 남은 시간을 모조리 손상시키는 일이라는 것도. 자신의 소멸은 물론 연결된 무수한 타인들을 해칠 각오를 할 수 있어야 자살 또한 감행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 용기로도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이 용기 또한 아무리 칭찬받았어도 자살에 성공한 자는 그걸 알 수도 들을 수도 없다.


'자기 연민이 자기 과시의 이면'이라는 표현이 가장 와닿았다. 결국 죽음이라는 극단적 결론을 고려하는 순간까지 학습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약자라기보다는 사회적 연결의 일부로서 기능하는 인간 영역의 한계일 것이다. 생물학적 죽음을 통해서라도 숨고 싶어도 결국 남는 건 사체이고 비정형적 결론에 이른 사체는 타인의 눈과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자살은 마지막 공연이다. 무대 위에 쓰러진 자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많은 이들에게 생의 피날레 장면을 노출하게 된다. 자신을 죽일 만큼 아꼈고 끝내 주변 모두의 -1이 된다. 느리고 침착하며 이성적인 자살에 이를 수 있을까. 아니면 얼마 전 본 애플 TV 오리지널 시리즈의 한 장면처럼 복잡한 체념의 표정으로 담담히 약을 삼킬까. 자살 앞에 어떤 수사가 붙든 자살은 자살이다. 죽은 자는 생의 책임에서 떠났고 살아있다는 이유로 남은 자들이 남은 과정의 대가를 치른다. 스스로의 의지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끝내는 것. 결국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런 책에 실리는 몇 줄의 문장이 되거나 각자의 방식으로 떠올리는 주변인들의 속삭임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