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피, 바람이 분다

한재림 감독. 관상

by 백승권

관상의 가장 위트 있는 부분은 특정 장면의 대사와 연기보다는 '부관참시'라는 단어였다. 목을 잘리기 싫어 목을 부지하기 위해 목을 자를지 모를 어떤 적도 만들지 않으려 전전하며 살아왔지만 끝내 시체가 되어 파묻힌 후 다시 꺼내어져 목이 잘린 운명. 그는 끝내 예견된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그것이 삶 이후의 죽은 상태의 결과더라도.


모두가 세상을 뒤덮어 지배하는 듯 보이는 바다가 도리어 하지만 철썩거리는 파도의 일부분이 될 뿐이고 그마저도 자신과 뜻이 맞는 다수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닌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잠시 그리 될 수 있었다는 것. 밀려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결국 광해에서도 가짜 광해가 바꾼 것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꿈을 꾸었다가 목숨이 달아날 뻔했다. 관상도 마찬가지, 관상쟁이(송강호)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타고난 능력으로 닥쳐올 결과를 미루어 짐작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뿐.


역사에 기록된, 정쟁에 의한 대학살이 얼마나 흥미로운 소재가 될 수 있는지는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편이 아니란 이유든, 개인(수양대군, 한명회)의 부귀영화를 위해서든, 다수의 오장육부를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어지는 장면을 '구경'하는 건 불편할지언정 다양한 쾌감을 준다. (난 지금 극장이니까 당연히) 그 자리에 내가 없으므로 피해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무의식에 깔려있는 형체 모를 분노의 대상에 대한 공격성 표출의 대리만족, 어떤 우두머리든 피의 역사 위에 세워질 수밖에 없다는 정보의 재학습.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많은 가학과 피학을 간접 경험한다. 타인의 고통에 안전거리를 유지한다. 나약한 개인이 감당할 수밖에 없는 시련에 공감하지만 그 고통이 영상화된 픽션이지 자신의 현실에 결코 적용되지 않고 있다고(적용될 리 없다고) 안도한다.


관상쟁이는 타인의 얼굴은 읽을 수 있었지만 '시대'를 볼 수 없었던 자신의 초라한 한계를 피와 뼈가 으스러지고 나서야 실감하고 만다. 어떤 강력한 권력자도, 그를 따르는 쥐떼 같은 무리들도 목적을 쟁취했을지언정 모두 등 뒤의 바람에 떠밀린 것이라 말한다. 바람은 시대는 원한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영화 관상은 오르내리다 부서지는 파도를 오랫동안 보여준다. 꿈은 개인의 영역이고 역모는 왕을 바꿀 수 있지만 모든 것은 흐름의 일부라고. 역사는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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