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드라마로
현실에서 도망치는 일이
현실의 일부가 된 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되돌릴 필요를 느끼지 못해요
도망치고 싶은 적이 많았고
도망칠 곳이 없었는데
좋은 작품들은 기꺼이
지하실 깊은 방문을
열어줬으니까
(한참 후 다시 쓰며)
거기서 나오고 싶지 않아요 여전히
거기서 나오지 않은 걸지도 모르고
그걸 나만 모를지도 모르고 모두
알지만 말해주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각자가 어떤 세계를 보며 살든
지나가든 머무르든 엉켜있든 동정하든
결국 단 1픽셀도 같지 않을 수 있어요
그때까지 중첩된 생의 경로와 이미지의
레이어가 완전히 달라서 우리의
등을 붙여놓고 먹이고 재우고 씻겨도
우린 그렇다고 믿을 뿐 뇌를 공유해도
각자의 사고를 처리한 시각에 따라
달라요. 다르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
무지라는 분리, 분리라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불멸성. 신이 인형놀이를 하다가
실수로 우리의 경로를 겹쳐놓았던가
아차... 얘네가 여기서 마주할 애들이 아닌데
인간의 지성과 상상력이 어디까지
스스로를 망가뜨릴 수 있나
우린 우리가 아닐 적부터 단 한순간도
우리인 적이 없었는데 그걸 덮어만 두기 두려워서
뭐라도 변호와 명분을 두고 싶어서
어차피 우린 마주했을 사이 또는 이왕
마주했으니 같은 코에 꿰어 한벌의 스웨터가
되었으니 낡고 닳아 수거함에 들어갈 때까지
같은 속도로 늘어나고 올이 풀리고
더럽혀지고 방치되며 잊히며 소각장에
넣어질 때까지 하나의 물질이 되자고
즐거운 불행을 맹세한 거야 어차피
우리의 근본과 원본은 미스터리로 봉인될 테니
우리는 말해주지 않은 것들을 굳이 묻지 않고
잊지 않겠다는 혼잣말을 다시 들려줬지
우리는 누구였어
나와 나였다가
나와 너였다가
너와 너였다가
나와 나인 줄 알았던
우리는 서로를 다르게 인식하다가 어느 순간
잊고 지냈던 나이거나 잊고 싶었던 나이거나
잊을 수 있는 나이거나 잊혀지지 않는 나이거나
나를 의식하지 않을 때가 가장 나일 텐데
나의 부피와 질감을 인식하는 순간 딱
그 바깥 세계에 대한 이질감의 폭력이 시작되고
너는 내가 아니라는 현실
그걸 믿고 있는 착각
쉬운 절망을 자처하는 능력
시간을 망가뜨리는 낭비벽
도망친 적 없었어요
도망칠 수 없었고
늘 여기였어요
눈을 떴지만
눈이 안 보이는 것처럼
https://www.peterfetterman.com/artists/547-gianni-berengo-gardin/wor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