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렵다

그만큼 우주의 개수가 사라졌다

by 백승권

샤워기를 튼다. 냉수로 돌린다. 맨발, 굽은 허리. 바닥으로 고정된 시선. 뒤통수를 향해 물줄기가 뿜어 나온다. 두피를 적시고 귓가를 지나 뺨을 감싼다. 목덜미를 덮더니 등줄기로 몇 가닥 침범하기도 한다. 한기를 느낀다. 피부가 반응한다. 아니 그보다 먼저 낮아진 체온이 각인된 감정을 소환한다. 수년 전 몇 번 물에게 느꼈던 공포. 허우적거려도 발이 닿지 않은 곳에서, 키를 훌쩍 넘기는 물속에서 죽음과 잠시 만났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았는데도 섬뜩한 고립을 경험했다. 가끔 지인들과 모인 자리에서 웃음거리가 될 소재였지만 난 진심으로 웃지 못했다. 바닷물이 입안으로 들어와 호흡기를 잠식했던 순간이 여전히 생생하다. 최근 며칠 샤워기 물줄기 속에서 다시 떠오르곤 했다. 구체적 이미지가 아닌 구체적으로 각인된 공포였다. 젖은 몸을 닦아낸다고 해도 감정까지 지워낼 순 없었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감각과 기억의 영역이라 토로한다고 해소될만한 것도 아니었다. 의미 그대로의 각인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몇 번 정도 죽을 고비를 넘긴다. 나 역시 그러했다. 10대 때, 20대 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상세히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하다. 부러진 뼈는 붙고 찢긴 살은 아물며 물리적 회복 단계를 거쳤지만 사고 이후 조금 달라진 게 있었다. 일종의 방어기제랄까. 비슷한 시기를 지나며 비슷한 파고와 감정상태를 겪었다고 여겼다. 그 비슷함이 절대다수에 속해 있지 않았다. 난 언젠가부터 현실에서 겪는 타인들의 비극을 미디어로 마주하는 일을 피하고 있었다. 인간극장이나 다큐멘터리를 통해 소개되는, 가난과 병 등에 의해 생존과 생활에 극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TV에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타인이 불행하다는 정보를 알게 된다는 점이 불편했다. 소재의 선정성이 높은 관심과 공감대를 얻으며 시청률에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난 그런 방송의 대상이 아니었다. 현실의 불행과 마주하는 게 힘들었다. 영화 속 살육에는 익숙해져 있으면서도 ‘리얼’을 표방하는 TV 방송은 견디기 힘들었다. 견딜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모든 인생엔 일정한 비율의 희로애락이 녹아있을 텐데 슬픔과 고통만을 편집해서 내보내는 것 같았다. 그게 장사가 된다는 건가. 채널을 돌려야 했다.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모든 채널이 한 가지 이야기를 하는 요즘, 한 가지 감정만을 강요하는 요즘, 한 가지 행동만을 촉구하는 요즘, 나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었다. 피한다고 피해지는 사안이 아니었다. 일본 지진 장면을 중계하던 때와도 달랐다. 스며들고 있었다. 피부를 뚫고 오고 있었다. 몇 시간 떨어지지 않은 바다에서 벌어진 일이 지루하지만 견고하게 반복되고 있다고 여겼던 일상을 뒤흔들고 있었다. 평소 SNS에서 조잘대던 입을 다물었다.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표현할 수 없었다. 스스로의 억제가 아닌 사태의 심각함이 이성과 감정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건 예의야, 이건 문제야, 판단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 박탈해야 했다. 난 털끝만 한 단어 하나가 후벼 팔지도 모를 만약의 경우를 감당하지 못할게 자명했다. 어느 죽음도 어느 슬픔도 어느 절망과 어느 비극에도 더 이상 가해의 가능성을 주고 싶지 않았다. 침묵이 옳다고 판단한 게 아닌, 침묵의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두려웠다. 많은 생명들이 영원히 잠들었다. 이토록 갑작스럽게.


‘명’으로 기록되는 목숨은 얼마나 가볍게 읽히고 소비되는가. 누군가 그랬다. 그만큼 우주의 개수가 사라졌다고. 동의한다. 그뿐인가. 시간도 함께 사라졌다. 앞으로 80년도 더 살아갈 이들이었다. 국가는 인류는 이번 일로 수천 년의 시간을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수천 년의 미래를 잃어버렸다. 수천 년의 사랑과 수천 년의 꿈을, 희망을,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 그 전의 기억은 주변인들과 주변 세계에 오랫동안 남겠지만 그 이후에 펼쳐질 가능성을, 주변을 넘어 세계 곳곳으로 스며들 지식과 지혜를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놓쳐버렸다.


계단을 오르내리면서도 충격과 공포와 싸우는 듯한 압박감을 겪는다. 거리와 지하, 도심 전체가 들끓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조금만 경로를 이탈해도 폭발과 파괴가 시작될 듯한 조짐이 느껴진다. 나만 이럴까. 아니, 앞서 고백했듯 나는 타인의 비극과 이를 중계하는 모습에 비교적 거리를 두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거대한 불안에 휩싸이고 있다. 꿈이 아닌 어제, 오늘, 방금의 일. 입을 다물고 있음에도 두렵다. 세계와 세계가 서로가 서로를 어느 한쪽이 아닌 스스로까지 모두 쓰러뜨릴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을 듯한 긴장감이 떠나지 않는다. 극심한 피로에 시달린다. 천근 같은 중력에 몸을 오그라뜨리면서.


나의 이러한 불안과 피로가 다른 누군가와 닮아있거나 세계가 동시에 느낀다고 여기지 않는다. 차라리 개인의 망상에 불과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하지만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많은 장면과 이야기들이 말하고 있다. 무너지는 혼들과 무너지는 몸들, 무너지는 세계와 무너지는 질서 안에서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을 예언하고 있다. 극복과 회복을 위한 필연적 움직임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그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어둠을 감지한다. 이미 잃은 이들과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이들, 이들과 정신을 같이 하는 이들이 한데 모여, 쉽게 정지시킬 수 없는 움직임이 시작될 것 같다.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까. 너무 많은 부분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보수되지 못할 것이다. 무너진 것보다 더 많은 부분이 새롭게 대체되지 않는 이상, 이미 시작된 싸움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두렵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인간의 방어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