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후 생각해보니
다 별거 아니었구나
이만큼 당시를
평가절하하는 말이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면서도 지켜야 할
더 소중한 별거가 있다는 게
뒤엉킨 삶의 거칠게 썰린 단면
끝의 길이와 부피에 대해 자주 떠올려
끝의 무엇에 대해 생각하는지에 따라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 가늠할 수 있어
의도한 관점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게 아닌
떠오른 이미지를 확인하며 내가 지금
어떻게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지
엎드려 있는지 쓰러져 있는지 추적해
끝에 더 가까워진 것 같아, 아까는
끝을 통과하는 기분이 들었어
아주 오랫동안 리본을 끄르지 않았던
상자가 있었는데 막상 열고 나니
아무것도 없었다면 어떨 것 같아
아무것도, 아무 기분도 들지 않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상자를 준비한 것도
리본을 묶은 것도 바로 나였어
하여 나는 유일하게 비웃을 수 있어
이럴 줄 알았다며 조롱할 수 있어
입을 막고 배를 잡고 웃을 수 있지
슬픈 영화는 끝을 알고 다시 봐도
언제나 다시 슬플 수 있어
상자가 비어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자 안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어
이게 스스로 비웃는 방식
상자의 겉면은 파란
도라에몽의 눈물색
심지어 난 로봇도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