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혜진 감독. 하얀 차를 탄 여자
가둔 사람을 죽이지 않으며 나올 수 없는 감옥이 있다. 제때 죽이지 않아서 내내 내가 죽어야 했다. 정신을 차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너와 내가 나를 같이 죽이고 있었구나. 도망치지 못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피해자를 같이 가두고 같이 죽이고 있었다. 친족 폭력의 나비효과였다. 언제까지 언니가 찌르는 유리조각에 살이 찢겨 피를 흘릴까. 언니가 가둔 감옥에서 꺼내달라고 손톱이 빠지도록 벽을 긁고 제발 문 좀 열어달라고 울부짖어야 할까. 쓸모없는 년이라는 아빠의 물고문을 언제까지 당해야 할까. 익사할 때까지? 내가 죽어도 그 새끼는 재수 없다고 침을 뱉을 텐데?
어디까지 각오했을까. 악이 쌓이다 보면 살인이 된다. 피해자는 살인자가 된다. 가해자들은 너희가 때리는 그 사람이 언젠가 너를 죽일 거라는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 살기에 취해 계속 때리고 웃고 눈물 흘리는 연기를 하며 계속 때리고 가두고 돈을 빼앗지. 빼앗은 돈으로 벤츠를 사지. 빼앗은 어린 시절로 술을 사 먹지. 약하고 착한 애들이 머리를 모아봤자 멀리 못가. 가해자들끼리 싸우게 하자. 눈이 어두워 좀비를 물어뜯는 좀비처럼, 바위로 머리를 내려치게 하자. 안 죽었으면 후진해서 한번 더 죽이자. 그래도 돼. 너희가 우리를 먼저 죽였으니까. 용서는 없어.
아무리 철저한 계획이라도 운이 필요하다.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이정은)이 피해자(정려원)와 유사 트라우마에 시달릴 확률은 높지 않다. 하지만 한국의 모든 여성은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동안 남성이라는 유해물질들에게 폭력을 당한다. 얼룩 같아서 잘 빠지지도 않는다. 더 커진 벌레 같은 성인 남성이 매일 같이 공격한다. 후배 경찰조차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사람 취급이나 했을까. 농담이랍시고 외모 가지고 놀리며 커뮤니티에 찌든 사회성이나 전시하며 명을 재촉했겠지. 공권력이 여성일 때 여성 피해자가 이해받을 가능성은 조금 높아진다. 적어도 추가적인 사회적 죽음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
하얀 차를 탄 여자는 죽은 여성과 산 여성의 연대가 어떻게 남은 자들을 구하는지 보여준다.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이토록 처절하게 얽힌 복수로 돌아올 수 있는지. 모든 선의는 결국 연결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가해자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얻게 되는 해방의 자유. 정신적 비가시적 깨달음 따위를 통해 얻는 해방과 자유는 바깥에서 잠긴 문을 열어주지 못한다. 복수심으로 가득한 여성과 여성이 가까워질 때 둘의 칼날이 각자의 가해자들을 겨냥할 때 가해자들이 피와 얼음 속에서 숨이 끊길 때. 비로소 그때까지 자신의 초상을 내내 치르며 입었던 상복을 벗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