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가고, 구제불능의 남자

고레에다 히레카즈 감독. 태풍이 지나가고

by 백승권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부연설명이 필요 없다. 삶에 대한 이런 단호한 정의가 삶을 지탱한다. 허나 이것이 현재의 변명이 되는 순간은 많이 누추하다. 내 뜻대로 되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라는 푸념은 안타깝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기 때문에, 너의 뜻대로 되지 않은 건 너뿐만이 아니야 다들 뜻대로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고. 하는 눈빛으로 돌려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한탄하기에 이만큼 적절한 표현도 없다. 뜻대로 되지 않는 삶, 결국 누군가는 뜻대로 되었나?


료타(아베 히로시)는 한때 촉망받던 소설가였다. 신작을 구상 중인데 너무 오래 걸려 먹고 살길이 막막하다. 결국 이혼하고 가끔 아들과 놀아준다. 양육비 지급도 어려운 형편. 아이 아빠니까 얼굴 보는 거지, 전 남편이 좋을 리 없다. 구제의 여지가 있었다면 이혼에 이르지도 않았겠지. 료타의 전 아내 쿄코(마키 요코)는 다른 시작을 준비 중이다. 새로운 남자를 만나 아이와 안정적인 삶을 꿈꾼다. 친아빠와 사는 게 아이를 위해 더 좋겠지만 더 이상 그의 무능을 감당하기 힘들다. 한때 영원을 약속했을, 이상주의자 남자는 현실주의자 여자를 늘 힘들게 했다.


료타의 노모, 요시코(키키 키린)는 이런 모습을 보며 눈물을 훔친다. 금쪽같은 아들과 딸 같은 며느리, 세상에서 젤 예쁜 손주가 같이 못 사는 이러한 풍경에 가슴이 미어진다. 어떻게든 다시 이어주고 싶어 안달이다. 거대한 태풍이 덮치고 하룻밤 료타와 쿄코, 둘의 아이는 요시코의 집에 머물게 된다. 여기서 가족이 온전히 회복된다면 얼마나 간지러웠을까. 아이와 할머니는 간절히 둘의 결합을 원하고 료타 또한 넌지시 재결합의 뜻을 건네 보지만 쿄코는 단호하다. 쿄코의 표정에 수많은 과거가 스친다. 얼마나 많은 외로움과 인내가 그녀의 뺨을 할퀴고 지나갔을까. 홀로 아이를 돌보고 홀로 남편을 기다리고 홀로 집에 덩그러니 남아 둘이 계획한 삶을 홀로 감당하고 있고. 플래시백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삶의 피로함이 시간을 거슬러 덮쳐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회귀를 바라는 료타는 비겁했다.


한때 그렸던 각자의 꿈. 뜻대로 되지 않은 현재, 야구를 좋아하는 자식에게 미즈노 글로브를 사주기 위해 고등학생의 약점을 잡아 돈을 갈취하는 남자, 료타는 행색만큼이나 풀리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마인드로 이것저것 찔러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난 결국 글감을 찾고 대사를 수집하며 글을 쓰는 소설가 라는 중심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만의 중심. 그런 놓지 못하는 꿈이 그의 가족을 분열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만약 소설가로서의 꿈을 접고 나른하고 심심하고 괴롭지만 성실한 회사원이 되었다면 가족은 유지되었을지도 모른다. 쿄코는 떠나지 않고 아이는 어떻게 나마 학교를 다니고 야구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만약이고, 료타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를 떠나보내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소설가라는 꿈과 가족의 유지라는 현실. 이게 과연 저울질할만한 것인가라고 분분할 수 있다. 하지만 꿈을 선택한 료타는 현재 꿈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가족도 제대로 만나지 못한다. 아버지의 값비싼 유산을 찾아 엄마 집을 방문하고 누나와 다투며 엄마의 응석받이에 우쭈쭈 어린아이처럼 굴뿐이다. 저게 진짜 다큐 같은 삶일지 몰라도 40대에 이르러 저런 삶의 그림을 원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료타는 일정한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짐을 주변인의 근심으로 죄다 나눠놓은 상태였다. 커다란 눈망울로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삶의 지표를 어린 아들에게 말해주던 남자, 하지만 아들의 엄마이자 아내에겐 끝내 외면당한 남편. 희망은 좋은 거지만 매번 닥치는 태풍에게서 자신과 주변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좀 더 다른 결기가 필요했다. 이런 관점에서 료타는 주변에서 원했던 모습을 끝내 갖추기를 거부했고 그 태풍들 사이에서 길을 잃어 더 멀리 돌아가야 했다. 꿈이 좋은 걸 누가 모르나. 쿄코는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현실 대응에 기본적 요건을 갖춘 남자가 필요했다. 료타는 아니었다. 태풍이 아무리 지나가도 료타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체념을 짊어진 타협 또는 각자의 길을 가는 것만이 남은 생 속에서 둘을 휘저을 것이다.




영화적 기록은 무조건 선호만을 표현하지 않는다.

연애의 허상 - 영화와 사랑에 대한 비밀과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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