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맨골드 감독. 로건
누군가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경제적 여유와 사회적 지위가 약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미 진행되고 담당해야 하는 피곤한 일들에 또 하나의 의무가 더해지는 일이다. 한때의 영웅이라니. 자신의 가장 왕성했던 시절을 박제해둔 채 판타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이나 그걸 알고 움츠리며 사는 영웅이나 삶은 죽지 못해 사는 지옥과 다를 바 없다.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남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줘야 돈을 받을 수 있다면 그곳으로 졸리고 짜증 나도 운전대를 놓지 말아야 한다. 가난과 노동에 찌든 일상. 주름 가득한 거친 피부와 가득 찡그린 표정, 수염 덥수룩한 턱선을 보면 누구도 저 사람이 한때 적들의 팔다리를 분리했던 히어로 캐릭터였음을 믿지 못할 것이다. 영업용 차에 흠집 날까 봐 안달 난 야만인일 뿐.
사연은 그렇게 과거를 가둔다. 사연의 내용이 무엇이든 울버린(휴 잭맨)은 어지간한 인간보다 낮은 수준의 삶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병들고 나약해진 아비 같은 찰스 자비에(패트릭 스튜어트)를 건사하고 있었다. 햇빛이 조금만 닿아도 피부가 불타버리는 칼리반(스테판 머천트)을 챙기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시종일관 투덜거렸고 분노와 짜증에 차 있었으며 거기에 고향도 엄마도 없어 보이는 소녀까지 한집 식구가 되었다. 자신과 주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보다 더 최악일 수 없었다. 내다 버리고 싶었지만 기계팔(보이드 홀브룩)과 중무장한 거구들이 먼저 찾아왔다. 소녀(다프네 킨)를 넘기라고.
상관없었다. 어차피 누군지도 모르고 안다고 한들 챙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루빨리 돈을 모아 초호화 보트를 사서 여생을 보내든, 자살을 하든 둘 중 하나였다. 한때 로라보다 더 작은 아이들까지 기꺼이 챙기던 울버린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몰골로 매일 술에 취해 죽지 못해 사는 지친 중년 남자 자체였다. 시간의 마법이 발휘되었다. 같은 시간대와 장소를 지나며 소녀 로라와 울버린은 서로를 알아간다. 서로 닮은 점을 찾고 연민을 지니며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법을 체득한다. 쫓기고 쫓기며 울버린은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았고 로라는 자신의 친구들과 연대한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 없던 울버린에게 아버지 그 이상의 존재감을 지녔던 찰스가 숨을 거둔다. 울버린은 단숨에 고아가 되었다. 이젠 클로에 베여도 아프지 않을 자식 같아진 로라까지 책임지고 데리고 다녀야 하는.
울버린은 점점 무한을 꿈꾸는 인간에 가까워진다. 삶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삶이 아니었다. 자신과 비슷한 성장 배경을 지녔고 자신과 같은 불행을 겪을지도 모를 로라에 대한 연민이 샘솟는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저 아이는 제대로 살 기반을 마련해두고 떠나야겠다는 출처 모를 아비의 심정이 피어오른다. 마치 평범한 인간의 욕망이라도 장착한 듯, 울버린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히어로 울버린에서 인간 로건이 된다. 더 뚜렷해진 생의 목적처럼 클로의 날을 세운다. 다시 적들의 몸통을 사정없이 분리하기 시작한다. 끝이 오기 전까지 하나라도 더 죽이기 위해 말 그대로 필사적이 된다. 자신의 삶이 아니었다. 로라의 삶을 위해서였다.
자신과 닮은 신형 뮤턴트에 의해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입는 것은 그동안의 살육에 대한 부메랑일지도 모른다. 인간 세계에서 타인을 해하는 것에 대한 형벌은 결국 자신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로라를 남기고, 울버린은 로건이 되어 사라진다. 자신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친구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서 그는 자신이 그토록 꿈꿨던 결말에 이르고 만다. 과거는 이렇게 끝났고 미래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한때 용맹과 정의감을 떨쳤던 히어로였을지라도.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로라의 기억에 오랫동안 머물고 싶겠지만, 로건은 평범하지 않았고 로라 역시 로라의 삶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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